쓰러졌다 살아 돌아온 친구야 고맙다!

간경변을 이겨내고 있는 친구와 함께 한 송년회

등록 2006.12.20 09:40수정 2006.12.2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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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 28일 나는 <오마이뉴스>에 친구 이야기를 하나 올렸다. <체중 22kg 감량, 그 참다운 비법을 알려주마!>라는 기사였다. 그 기사 주인공인 친구가 간경변으로 쓰러져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다가 기적처럼 병원에서 퇴원했다. 자신의 치과에 복귀해 진료하고 있는 그를 지난 18일, 친구들이 찾아가 조촐한 송년회를 가졌다.


건강해 보였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쓰러지다

a 친구의 무사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먼 길 마다않고 달려온 친구들. 왼쪽부터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다 기적처럼 살아난 친구 이거종. 최진과 오세림. 액자 속 사진은 작년 7월, 친구 이거종 관련 기사를 썼을 때 사진.

친구의 무사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먼 길 마다않고 달려온 친구들. 왼쪽부터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다 기적처럼 살아난 친구 이거종. 최진과 오세림. 액자 속 사진은 작년 7월, 친구 이거종 관련 기사를 썼을 때 사진. ⓒ 이동환


@BRI@지난 추석 연휴에 친구는 쓰러졌다. 간경변에 따른 급성 혼수였다. 닷새 동안 힘든 산행을 끝내고 집에 오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평소 건강관리를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야간산행 동호회 활동을 하는 등 틈만 나면 운동에 빠져 있던 친구였다. 그런 그가 쓰러지다니 믿을 수 없었다.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친구를 못 알아본 것이다. 피골상접도 분수가 있지, 말 한 마디조차 힘들어하는 그 몰골은 내 친구가 아니었다.

친구를 보고 그의 부인을 위로한 뒤 돌아오는 길. 나는 어둑어둑해진 병원 밖 택시 타는 곳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혹시 저 친구를 다시 못 보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친구는 강했다. 아산병원 의사들이 놀랄 만큼 기적 같은 회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힘겨운 투병 끝에 그는 보란 듯이 일어나 자신의 치과로 돌아왔다.

문제는 술이었다. 친구나 나나 폭음하는 습관이 있었다. 30대에는 그와 함께 3박 4일 동안 인천 시내 맛있다는 집은 다 찾아다니며 술독에 빠지곤 했다. 돌이켜 보면 참 미련한 짓이다. 이제 친구는 한 모금이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나 역시 술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전처럼 폭음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술을 자주 마신다. 학원 업무 끝난 뒤 젊은 강사들과 반주 몇 잔을 꼭 마시니 알코올 중독자가 따로 없다. 그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송년회다 뭐다, 내 주변이 온통 술독 천지다. 또 한 해가 가고 나이 한 살 더 먹는데 이제는 심각한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는 왜 그렇게 술을 마셨을까?

a 오랜 만에 바둑판 앞에 마주 앉은 친구들. 나를 포함해 이날 모인 네 명 친구들은 바둑이라는 매개(네 명 모두 아마 유단자)를 통해 오랜 세월 같이 했고 또 그렇게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다.

오랜 만에 바둑판 앞에 마주 앉은 친구들. 나를 포함해 이날 모인 네 명 친구들은 바둑이라는 매개(네 명 모두 아마 유단자)를 통해 오랜 세월 같이 했고 또 그렇게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다. ⓒ 이동환

친구나 나나 참 굴곡 많은 세상을 살았다. 누군들 삶이 평탄할까 마는 둘 다 '세상 바라보기'와 '고뇌하기'가 참 유난스러웠다. 술독에 빠진 정도는 아니었지만 술 마실 기회가 있으면 가끔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까지 폭음으로 이어졌다.


이 시대 40대 남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대개 8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을 것이고 시대에 따른 번민을 술로 푸는 습관이 몸에 배었을 터. 직장 회식문화도 문제는 있다. 요즈막엔 직장회식도 많이 변한 모양이다. 건전한 놀이문화로 대체하고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나는 모 문화재단 일을 겸할 때 직장 회식문화를 취재하면서 아연실색한 적이 있다. 오죽했으면 모 회사 홍보책자 발간을 맡으면서 나는 '충성주와 하사주'라는 대목을 삽입하기도 했다. 변명 같지만 나는 술을 마시되 1차 이상은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그 1차에서 폭주로 널브러졌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부끄럽지만.

딸린 식구들을 생각해서 이제 정신 차려야지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 시인의 '가정')


여전히 투병 중인 친구와 함께 한 저녁식사 자리. 소박한 전골을 시켜놓고 송년회를 대신하며 문득 네 명의 친구에게 딸린 식구를 생각해봤다. 나를 포함해 네 명의 친구에게 딸린 자식만 합해도 아홉이다. 다 큰 녀석도 있지만 올망졸망, 아직 우리만 바라보는 어린것들이 대부분이다. 이제는 정말 환골탈태해야 한다.

송년회다 뭐다, 연말이다 뭐다, 밤거리가 연일 휘청거린다. 내게는 아주 중요한 지역모임 하나 제외하고 나는 금년 대부분 송년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직 몇 차례 더 있지만 나는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내 생애 가장 충실하고 보람 있는 12월을 보내는 중이다. 10여 일 동안 동해안을 걸으며 스스로를 되새김질했고 생전 처음, 향후 10년 계획서라는 것을 작성했다. 술은 지난 세월 마실 만큼 마셨다. 물론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한 잔은 물리치지 못할 것이다. 참새, 방앗간 그냥 못 지나치니까. 그러나 나를 포함해 술 너무 좋아하는 40대 가장들은 변해야 한다. 어차피 백 년도 못 살 바에야 하늘이 주신 책임이라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백 년도 못 사는 인간들아(生年不滿百),
천 년의 근심으로 사는가 (常懷千歲憂).
/ 삿갓 김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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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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