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산사에서 꿈꾸듯 첫눈을 맞다

전남 순천시 승보종찰 송광사를 다녀와서

등록 2006.12.20 20:14수정 2006.12.20 20:54
0
원고료로 응원
순천 송광사 대웅보전과 하얀 눈꽃이 내려앉은 목백일홍.
순천 송광사 대웅보전과 하얀 눈꽃이 내려앉은 목백일홍.김연옥

나는 지난 17일 아침 전라남도 순천시에 개인적인 일이 있는 친구를 무작정 따라나섰다. 춥고 을씨년스러운 겨울이 싫어 한동안 익숙하여 편안하기까지 한 일상에 묻혀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젠 지독한 우울이 스멀스멀 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게 아닌가.

내가 사는 마산에서 두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순천. 마치 눈 오는 마을 풍경을 담은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는 것 같은 설렘을 주었다. 차창 너머 온 세상을 하얗게 덧칠을 하고 있는 눈발을 바라보며 나는 아름다운 동화 속의 도시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쓸쓸한 겨울에 하얀 발 내밀고 조용히 내려앉는 첫눈은 메마른 마음밭에 갑자기 찾아든 사랑 같은 것. 그래서 첫눈 오는 날 끝없는 눈길을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이 바로 곁에 있다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송광사 뒤에서.
송광사 뒤에서.김연옥

그날 마산에 그대로 눌러앉아 있었다면 아예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이른 첫눈. 나는 그렇게 꿈꾸듯 아름다운 첫눈을 맞았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 김용택의 '첫눈'


우리는 조계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송광사(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를 찾았다. 송광사는 16국사(國師)를 배출한 승보사찰(僧寶寺刹)로 우리나라 삼대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불교에서는 불(佛), 법(法)과 승(僧)을 가리켜 삼보(三寶)라고 하는데 송광사는 경남 양산 통도사(佛寶), 합천 해인사(法寶)와 함께 우리나라의 삼보사찰로 불리어진다.

송광사(松廣寺)는 신라 말 혜린선사가 세웠는데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다. 그런데 그 절이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기 위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벌였던 보조국사 지눌이 그곳으로 오면서부터였다 한다.


눈발이 흩날리는 송광사 일주문에서.
눈발이 흩날리는 송광사 일주문에서.김연옥

눈발이 흩날리는 송광사 일주문을 지나자 삼청교(능허교)라 부르는 예쁜 홍교가 나왔다. 절의 경내로 이어지는 그 다리 위에는 몸과 마음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여 부처님의 이상 세계로 가자는 의미에서 우화각(羽化閣)이 세워져 있다.

홍교와 우화각.
홍교와 우화각.김연옥

나는 삼청교와 우화각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연못에 드문드문 놓인 징검다리에 서서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무지개 다리를 건너 범종, 법고와 목어 등이 있는 종고루에 기대서서 눈 내리는 대웅보전의 장엄한 풍경에 그만 푹 빠져들었다.


종고루에서 본 대웅보전.
종고루에서 본 대웅보전.김연옥

승보전 앞에 놓여 있는 비사리 구시.
승보전 앞에 놓여 있는 비사리 구시.김연옥

박물관 앞 목백일홍에도 눈꽃이 눈부시게 내려앉았다. 태풍으로 쓰러졌던 싸리나무를 가공하여 만든 비사리 구시에도 하얀 눈송이가 슬며시 내렸다. 비사리 구시는 조선 영조 이후 국재를 모실 때 절로 모여든 사람들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나무통으로 대략 7가마 분량의 밥을 저장했다고 한다.

송광사 해우소.
송광사 해우소.김연옥

해우소에서 근심을 풀고 연못에 드문드문 놓인 정겨운 징검다리를 건넜다.
해우소에서 근심을 풀고 연못에 드문드문 놓인 정겨운 징검다리를 건넜다.김연옥

나는 큰 절에 가면 해우소(解憂所)에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근심을 푸는 곳이니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더욱이 꽤 운치가 있는 다리를 건너서 해우소로 들어가는 기분 또한 왜 그리 상쾌한지 말이다.

나는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차가운 바람에 실려 나무 창살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 작은 눈송이에도 그저 감탄만 했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 안도현의 '우리가 눈발이라면'


김연옥

김연옥

우리는 송광사 뒤로 해서 눈에 묻힌 산길을 걸어갔다. 너무도 아름다우면 왜 눈물이 나는 건지 나무들마다 눈꽃이 곱게 내린 그 길에서 그만 내 눈에 이슬이 맺혔다.

나는 첫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혼자서 걷기엔 너무 외로운 그 끝없는 길을 친구와 함께 걸었던 송광사의 하얀 추억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4. 4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5. 5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