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가야 여성들은 머리를 납작하게 눌렀다?

가야의 미스터리가 남아 있는 예안리 고분군

등록 2006.12.22 09:21수정 2006.12.2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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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김해 방면으로 14번 국도를 타고 가다 선암 다리를 건넌 후에 우회전하게 되면 푸르청청한 낙동강이 시원하게 나타난다. 이 낙동강을 끼고 6km 정도를 달리게 되면 대동군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고대 가야의 신비를 간직한 고분군 하나가 한적한 자태로 이방인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름 하여 '예안리 고분군'이라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분군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삭막한 잔디만 미풍에 간간히 날리고 있을 뿐이다.

고분군 전경
고분군 전경김대갑
이곳은 예안리 장시마을인데, 분동되기 전에는 시례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일제 시대만 해도 이곳에는 상당한 수의 돌널무덤들이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본놈들이 가야의 유적을 마구 파헤친 후 제대로 수습도 안 한 채 방치한 것이었다. 당시 주민들은 무덤들 사이로 밭을 개간하기도 했는데, 토기 조각을 주워내는 것이 일이었다는 것이다.


@BRI@참으로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 문화재 당국의 무관심이었다. 일본인들은 가야 문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진작에 도굴을 감행하여 유물들을 자기네 나라로 빼돌렸는데, 우리나라는 1976년에 부산대학교 박물관 팀이 처음으로 정식 발굴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미 지역민들의 무분별한 훼손 행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고 난 다음에 말이다. 관계당국은 그때에야 비로소 예안리 고분군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적지로 지정했다고 한다. 그저 입맛이 씁쓸할 뿐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예안리 고분군은 발굴팀의 노력덕분에 다양한 가야시대의 부장품들을 울컥울컥 쏟아내기 시작했다. 1976년에서 1980년까지 행해진 부산대학교 박물관의 조사 결과, 183기의 고분과 1400여점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고대 가야의 신비 간직한 예안리 고분군

가장 놀라운 것은 무려 210구에 해당되는 가야인의 유골이 아주 양호한 상태로 발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토질은 대체적으로 산성이 강하기 때문에 인골이 100년도 안 돼 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천오백년 전의 인골이 한 두기도 아닌 210구가 발견되었으니 이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고분군 표지
고분군 표지김대갑
예안리 고분군은 4~7세기 대 금관가야 및 그 이후의 서민계층이 이용한 집단 묘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귀족 계급이 아닌 서민 계층의 공동묘지였던 셈이다. 이 유적지의 분묘들은 상하 4겹으로 중복되어 있었으며 대체적으로 덧널무덤에서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으로 변해간 것으로 추정된다. 210구의 유구 또한 190평 남짓의 좁은 면적 내에 상하 4겹으로 겹쳐져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유구들을 통해 당시 가야의 묘제를 파악할 수 있고, 이 묘제들을 통해 가야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의 근간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유구들을 통해 우리 조상에 대한 형질인류학적인 연구가 가능해졌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문헌에 나와 있는 가야인들의 편두 습속이 사실로 증명되었다는 사실은 고고학 연구의 일대 전진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예안리 고분군 출토 유골
예안리 고분군 출토 유골김대갑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어린아이가 출생하면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하기 때문에 지금도 진한 사람은 모두 편두이다."

여기에 나오는 진한은 변진과 그 이웃을 말하며 가야지역을 일반적으로 통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 기록에 나오는 진한의 편두 습속은 가야 지역의 습속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안리 고분군에 나오는 인골을 조사해보니 여성 인골의 30%만 편두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추정이 가능하지만 꽤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여성 편두 습속이 미인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성형술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왜 편두가 미의 기준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고대 가야인의 편두습속...일종의 성형술일까

머리를 눌러서 인위적으로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습속은 주로 유목민 사이에서 나타난다. 코카서스 북부나 터키의 유목민들도 편두를 한 흔적이 있으며, 만주지방에서도 편두를 한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고조선 시대에 편두 풍습이 유행했다. 또한 지구의 반대편인 마야지방에서도 편두습속이 보이는데, 당시 마야는 귀족층 이상의 자녀들에게 종교적 의식으로 이런 습속을 거행하였다.

또한 최치원이 썼다는 지증대사비에 보면 신라왕이 편두를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천 리, 수만 리 떨어진 곳에서 동일한 편두 습속이 발견된 연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편두 습속이 전형적인 남방계열의 문화라고 주장하면서 가야인들 또한 남방계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천오백년 전의 무심한 인골
천오백년 전의 무심한 인골김대갑
편두습속이 왜 예안리 고분군에서, 그것도 여자 인골의 30%에서만 발견되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이다. 여러 역사학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아직도 정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하긴 수천년 전의 생활상에 대하여 어떻게 정확히 알 수 있겠는가. 몇 가지 역사적 유물과 기록에 의한 추정만 가능할 뿐이지.

중요한 것은 예안리 고분군이 남겨놓은 흥미진진한 이야기 꺼리들이다. 인골을 자세히 조사해보니 당시 남자의 평균키가 164cm이고, 여자는 150cm정도였다고 한다. 이 정도면 1930년 경 중·남부인들의 평균키보다 큰 편이라고 한다. 수천년 전의 조상이 현대인들보다 더 키가 크다? 그러면 인간이 그동안 진화한 것인지 퇴보한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일 뿐이다.

오래된 미래로서의 가야의 정수가 살아 숨쉬는 김해지역.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매력덩어리인 금관가야의 신비함은 황망한 예안리 고분군의 을씨년스러움을 무색케 한다. 부디 이 소중한 유적이 잘 보존되어 후손들이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역사의 타임머신>으로 써먹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미래의 후손들에게 잠시 이 땅을 빌렸을 뿐이다. 무지와 냉대로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유적을 잘 보호하지 못한 죄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아니었더라면, 일제에 의해 우리의 유적과 유물들이 도굴되지 않았다면 가야의 미스터리는 벌써 풀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송고

덧붙이는 글 유포터에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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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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