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군 전경김대갑
이곳은 예안리 장시마을인데, 분동되기 전에는 시례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일제 시대만 해도 이곳에는 상당한 수의 돌널무덤들이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본놈들이 가야의 유적을 마구 파헤친 후 제대로 수습도 안 한 채 방치한 것이었다. 당시 주민들은 무덤들 사이로 밭을 개간하기도 했는데, 토기 조각을 주워내는 것이 일이었다는 것이다.
@BRI@참으로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 문화재 당국의 무관심이었다. 일본인들은 가야 문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진작에 도굴을 감행하여 유물들을 자기네 나라로 빼돌렸는데, 우리나라는 1976년에 부산대학교 박물관 팀이 처음으로 정식 발굴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미 지역민들의 무분별한 훼손 행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고 난 다음에 말이다. 관계당국은 그때에야 비로소 예안리 고분군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적지로 지정했다고 한다. 그저 입맛이 씁쓸할 뿐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예안리 고분군은 발굴팀의 노력덕분에 다양한 가야시대의 부장품들을 울컥울컥 쏟아내기 시작했다. 1976년에서 1980년까지 행해진 부산대학교 박물관의 조사 결과, 183기의 고분과 1400여점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고대 가야의 신비 간직한 예안리 고분군
가장 놀라운 것은 무려 210구에 해당되는 가야인의 유골이 아주 양호한 상태로 발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토질은 대체적으로 산성이 강하기 때문에 인골이 100년도 안 돼 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천오백년 전의 인골이 한 두기도 아닌 210구가 발견되었으니 이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