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판 키드의 추억>웅진지식하우스
80년대 중후반에 중고등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워크맨'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당시에 '워크맨'이라는 단어는 라디오 기능이 있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이 워크맨을 들고 다녔고, 학교에 가지고 와서 다른 아이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나에게도 당시에 워크맨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이 워크맨을 가지고 학교에 갔던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체육이나 교련시간처럼,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가야만 하는 수업시간 때문이었다. 그런 시간이 끝나고 다시 교실로 들어오면, 아이들의 워크맨 중 한두 개는 어디론가 도난당하기 일쑤였다.
원래 이 워크맨은 부모님께서 영어공부를 하라고 사주신 물건이었다. 하지만 난 이 워크맨을 가지고 영어공부보다는 록음악을 듣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 용돈을 쪼개서 사모은 테이프, 그리고 <이종환의 디스크쇼>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와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음악을 녹음해서 밤마다 방에 처박혀 듣는 것이 당시 나의 취미생활이었다.
@BRI@집의 거실에는 전축도 있었지만, 그 전축은 여러 가지 사정상 내가 마음 놓고 손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당연히 나는 LP보다는 카세트테이프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하던 듀란듀란이나 마돈나의 음악보다는, 레드 제플린과 아이언 메이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는 비슷한 음악을 듣는 아이들과 열심히 정보를 교류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록음악에 관한 정보를 얻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월간 팝송> 또는 <음악 세계> 같은 잡지를 열심히 구독하는 것, 그리고 동네 레코드점 아저씨에게 귀동냥으로 정보를 듣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휴일에는 혼자서 종로에 나갈 때도 많았다. 청계천의 '빽판' 가게에 가면 그림의 떡인 무수한 LP 음반들을 구경할 수 있었고, 조금 걸어서 낙원상가에 가면 번쩍이는 악기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종로 2가의 '뮤직랜드'에 들어가면 역시 수많은 음반과 음악관련 책, 악보를 질리도록 훑어볼 수 있었다.
80년대 중후반의 이야기다. 종로 바닥에 나가면 최루탄의 흔적을 맡을 수 있던 때였고, 남학생들은 피비 케이츠와 소피 마르소의 사진이 붙어있는 연습장을 한 권씩 들고 다니던 때였다. 그리고 나로 말하자면 소주 한잔 마실 줄 모르던 순진한 시절이기도 했다.
개인적인 이야기 둘, 신현준
신현준씨를 좋아한다. 영화배우 신현준이 아니라 대중음악평론가 신현준을 말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현준이 쓰는 글을 좋아한다. 신현준이 93년에 쓴 책 <이매진, 세상으로 만든 노래>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일종의 존 레논 전기인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비틀즈 이후의 존 레논'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 후 PC통신이 유행하던 90년대 중반에, 나는 '나우누리'의 헤비메탈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 나우누리에는 신현준씨가 만든 음악비평 동호회 '얼트 바이러스'가 있었다. 우연히 얼트 바이러스에 들렀던 나는 게시판에서 신현준이란 이름을 발견했고, '이 신현준이 그 신현준인가?' 하고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는 얼트 바이러스에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열심히 '눈팅'을 했다. PC통신이 사라지고 인터넷이 보급된 후에는 신현준의 개인 홈페이지에 드나들며 글을 읽었고, 한 주간지에 연재되던 칼럼도 빼놓지 않았다.
신현준의 글을 좋아했던 이유는 무얼까. 대강 짐작해보자면 그가 쓴 음악비평 글들은 기존의 비평가들이 쓴 글과는 다르다는 것이 한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세상에 대해서 관조적이면서도 가시가 돋친 듯하고, 포괄적이면서도 섬세한 문체가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냉소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아니 이것저것 다 떠나서 신현준의 글은 무엇보다도 '재미있다'라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빽판 키드의 추억>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내가 이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이 책이 대중음악관련 책이라서 읽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신현준이 쓴 대중음악관련 책'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