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판 키드, 음악을 추억하다

[서평] 신현준 <빽판 키드의 추억>

등록 2006.12.22 12:09수정 2006.12.24 16:56
0
원고료로 응원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음악

<빽판 키드의 추억>
<빽판 키드의 추억>웅진지식하우스
80년대 중후반에 중고등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워크맨'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당시에 '워크맨'이라는 단어는 라디오 기능이 있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이 워크맨을 들고 다녔고, 학교에 가지고 와서 다른 아이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나에게도 당시에 워크맨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이 워크맨을 가지고 학교에 갔던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체육이나 교련시간처럼,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가야만 하는 수업시간 때문이었다. 그런 시간이 끝나고 다시 교실로 들어오면, 아이들의 워크맨 중 한두 개는 어디론가 도난당하기 일쑤였다.

원래 이 워크맨은 부모님께서 영어공부를 하라고 사주신 물건이었다. 하지만 난 이 워크맨을 가지고 영어공부보다는 록음악을 듣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 용돈을 쪼개서 사모은 테이프, 그리고 <이종환의 디스크쇼>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와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음악을 녹음해서 밤마다 방에 처박혀 듣는 것이 당시 나의 취미생활이었다.

@BRI@집의 거실에는 전축도 있었지만, 그 전축은 여러 가지 사정상 내가 마음 놓고 손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당연히 나는 LP보다는 카세트테이프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하던 듀란듀란이나 마돈나의 음악보다는, 레드 제플린과 아이언 메이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는 비슷한 음악을 듣는 아이들과 열심히 정보를 교류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록음악에 관한 정보를 얻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월간 팝송> 또는 <음악 세계> 같은 잡지를 열심히 구독하는 것, 그리고 동네 레코드점 아저씨에게 귀동냥으로 정보를 듣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휴일에는 혼자서 종로에 나갈 때도 많았다. 청계천의 '빽판' 가게에 가면 그림의 떡인 무수한 LP 음반들을 구경할 수 있었고, 조금 걸어서 낙원상가에 가면 번쩍이는 악기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종로 2가의 '뮤직랜드'에 들어가면 역시 수많은 음반과 음악관련 책, 악보를 질리도록 훑어볼 수 있었다.

80년대 중후반의 이야기다. 종로 바닥에 나가면 최루탄의 흔적을 맡을 수 있던 때였고, 남학생들은 피비 케이츠와 소피 마르소의 사진이 붙어있는 연습장을 한 권씩 들고 다니던 때였다. 그리고 나로 말하자면 소주 한잔 마실 줄 모르던 순진한 시절이기도 했다.


개인적인 이야기 둘, 신현준

신현준씨를 좋아한다. 영화배우 신현준이 아니라 대중음악평론가 신현준을 말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현준이 쓰는 글을 좋아한다. 신현준이 93년에 쓴 책 <이매진, 세상으로 만든 노래>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일종의 존 레논 전기인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비틀즈 이후의 존 레논'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 후 PC통신이 유행하던 90년대 중반에, 나는 '나우누리'의 헤비메탈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 나우누리에는 신현준씨가 만든 음악비평 동호회 '얼트 바이러스'가 있었다. 우연히 얼트 바이러스에 들렀던 나는 게시판에서 신현준이란 이름을 발견했고, '이 신현준이 그 신현준인가?' 하고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는 얼트 바이러스에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열심히 '눈팅'을 했다. PC통신이 사라지고 인터넷이 보급된 후에는 신현준의 개인 홈페이지에 드나들며 글을 읽었고, 한 주간지에 연재되던 칼럼도 빼놓지 않았다.

신현준의 글을 좋아했던 이유는 무얼까. 대강 짐작해보자면 그가 쓴 음악비평 글들은 기존의 비평가들이 쓴 글과는 다르다는 것이 한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세상에 대해서 관조적이면서도 가시가 돋친 듯하고, 포괄적이면서도 섬세한 문체가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냉소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아니 이것저것 다 떠나서 신현준의 글은 무엇보다도 '재미있다'라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빽판 키드의 추억>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내가 이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이 책이 대중음악관련 책이라서 읽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신현준이 쓴 대중음악관련 책'이기 때문이었다.

하드록의 추억, <벗지>의 음반들.
하드록의 추억, <벗지>의 음반들.김준희
신현준의 신간 <빽판 키드의 추억>

80년대에 록음악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빽판'을 접해보았을 것이다. 빽판은 불법복제음반을 지칭하는 용어다. 신현준의 표현에 의하면, 불법복제음반 가운데 편집을 거쳐서 만든 음반들과는 달리 원판의 콘텐츠를 그대로 담아낸 음반을 말한다.

물론 당시에도 외국 음반들의 상당수가 정식계약을 통한 '라이센스' 음반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었다. 하지만 '음반사전심의'라는 희한한 제도 때문에 수없이 많은 곡들이 금지곡으로 묶여있었다. 이런 금지곡을 듣기 위해서는 청계천 일대에 들어 서 있던 빽판 가게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300∼600원 정도면 빽판 한 장을 살 수 있었다. 물론 초록색과 파란색 일변도의 조악한 음반 커버, '빗소리'라고 부르던 지글거리는 잡음이 뒤섞인 음질의 음반이다. 하지만 빽판 가게에 가면 핑크 플로이드와 메탈리카의 음반은 물론이고, 일본 아이돌 그룹 '소녀대'의 음반까지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호기심은 넘쳐나고 돈은 부족하던 고등학교 시절, 이런 빽판은 제대로 된 음반을 감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빽판 키드의 추억>의 저자 신현준도 빽판에 얽힌 추억이 있다. 신현준은 자신이 어떻게 음악을 접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라디오와 TV를 거쳐서 전축으로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음악을 녹음하기 위해서 어린 시절에 가족과 갈등을 겪는 이야기까지.

60년대 말부터 시작해서 70년대를 관통하는 이런 이야기들은 단순한 개인의 성장사가 아니다. 책을 읽다 보면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모습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변해왔는지를 그려볼 수 있다.

신현준은 음악팬에서 마니아로, 마니아에서 평론가를 거쳐 문화 연구자로 변해 왔다. 이 책의 내용은 신현준의 그런 경력과 유사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개인의 과거, 음악과 관련된 추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조금은 진지하게 한국의 대중음악에 관한 담론을 풀어놓고 있다.

이중 흥미로운 부분은 81년 여의도에서 열렸던 '관제 행사' <국풍 81>과 연관된 이야기다. 당시 서울대 1학년이던 신현준은 그 행사에 저항하기 위해서 학내 집회를 마치고 학우들과 함께 여의도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여의도에서 10대 시절 자신에게 경이적인 존재였던 신중현이 무대에서 <아름다운 강산>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경험은 신현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이야기는 80년대를 거쳐서 90년대 초반까지 흘러오는 어떤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과도 같다. 신현준은 이 책의 뒷부분에서 '문화적 세련됨과 정치적 올바름'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문화적 세련됨을 추구하는 실천 속에 숨겨진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두 개의 지향이 서로 무관심하거나 적대시하지 말고 함께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한다.

추억으로 시작한 <빽판 키드의 추억>은 담론과 지향으로 끝을 맺는다. 평론에서 연구로 방향을 바꾼 신현준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빽판과 라디오에 관한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대중음악의 과거와 미래에 관해서도 나름대로 생각해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런 이야기들은 빽판 키드의 추억이자 음악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의 추억이기도 하다.

"내가 지향하고 싶은 것은 대중음악을 연예로 치부하지도, 예술로 박제화하지도 않고, 정서적 교감의 매체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대중음악의 역사와 현재, 나아가 미래는 하나의 지식이 될 필요가 있고, 그 지식은 공공의 것이 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빽판 키드의 추억> 신현준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덧붙이는 글 <빽판 키드의 추억> 신현준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빽판 키드의 추억

신현준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06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2. 2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3. 3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4. 4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5. 5 윤 대통령 조롱 문구 유행... 그 와중에 아첨하는 장관 윤 대통령 조롱 문구 유행... 그 와중에 아첨하는 장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