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웨이트 파병에 지원했다고?"

폭설 내리던 날 해외 파병 지원한 아들을 면회하다

등록 2007.01.07 11:25수정 2007.01.0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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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강원지역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서울.경기.강원지역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리고김혜원
"엄마,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꼭 좀 들어주세요."


군대간 아들의 전화. 눈물이 쏙 빠지게 반가워야 할 텐데 전화기 저 너머로 들리는 비장한 목소리 때문이지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렵기만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지난 해 봄 어느날 갑자기 "나 공군 지원했어요"라는 폭탄 선언과 맞먹는 선언을 합니다.

"저 쿠웨이트 파병지원했어요."
"뭐라구!? 쿠웨이트? 너 미쳤니? 누구 맘대로 지원을 해?"
"그러니까 엄마한테 이렇게 부탁하는 거예요. 저 입대하기 전부터 파병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닌데 꼭 가고 싶어요. 제발 동의한다고 해주세요. 엄마 제발이요."
"너 정말..."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려고 하는 것을 참고 있는데 눈치코치 없는 아들 녀석의 어미 가슴 후비기는 멈추지 않습니다.

"엄마, 어차피 한번 가는 군대인데 경험도 쌓고 멋지게 해내고 싶어요. 딱 한번만 제 소원 들어주세요."

그 뒤로 아들과 어떤 통화가 오고 갔는지는 필설로 형용이 어렵습니다. 갑자기 국제 정세 전문가가 되어 후세인이 처형 이후 불안해진 국제정세를 논했고, 전쟁유발가능성을 강조했으며 이라크전과 평화유지군의 문제점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기도 했지요. 짧은 전화통화. 이성적인 대화는 극히 짧았으며 대부분은 어미의 고성이었고 욕도 몇 마디 쏘아붙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엄마에게 아들은 세계평화보다 더 소중하답니다
엄마에게 아들은 세계평화보다 더 소중하답니다김혜원
결국 아들은 어미에게 더 이상 전화통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미의 극성에 그만 포기한 줄 알았는데 이번엔 제 아빠를 물고 늘어졌던 모양입니다.

"물론 나도 좋지는 않지만 남자로서 해 볼만한 경험이야. 쿠웨이트라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위험하지도 않고. 그리고 내가 알아보니 지원자가 엄청 많더라구. 수백 대 일을 뚫고 가는 거니 녀석 말처럼 가는 것도 쉽지 않아. 그러니 고집 센 놈 기 꺽지 말고 지원하도록 내버려 둬."
"그래서 해 줬어?"
"어, 별거 없더라구. 간단한 동의서만 팩스로 보냈지."
"으이구, 내가 못 살아. 한통속이 되어 가지고. 내일 당장 면회 가. 필시 무슨 답답한 일이 있는 거야. 내가 가서 달래볼래. 혹시 엄마가 자주 면회를 오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잖아."


다음날 아침. 텔레비전에서는 폭설이 예상된다는 일기예보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소한인 오늘(6일) 충남과 호남, 강원산간에는 내일까지 최고 15cm 정도의 많은 눈이 내리겠고요. 서울·경기와 강원·영서, 충북에도 오늘 하루 동안 2에서 5cm정도의 눈이 오겠습니다."

굵어진 눈이 어느새 도로 위에 쌓이기 시작하지만 아들 면회를 가겠다는 엄마의 발을 묶을 수는 없습니다. 눈길을 걱정하시는 부모님을 뒤로 하고 아들 면회를 가는 발걸음. 때로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굵은 눈발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도로로 나온 차들이 적은 탓인지 예상했던 시간보다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오나 정문을 지켜야하는 헌병들
눈이 오나 비가오나 정문을 지켜야하는 헌병들김혜원
아들은 헌병입니다. 이렇게 추운 날은 물론 토요일도 일요일 공휴일도 없이 근무를 서야 한답니다. 부대 입구에 다다르니 아들과 같은 헌병들이 나와 차량을 안내합니다. 쏟아지는 폭설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서 있어야 하는 헌병들이 오늘따라 참으로 안쓰러워 보입니다.

면회를 신청하고 얼마 있으니 아들이 위병소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어제까지 엄마 속을 팍팍 긁어 놓으며 쿠웨이트를 가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녀석. 막상 얼굴을 보니 붉어진 뺨에 먼저 손이 갑니다.

"너 얼굴이 얼었구나. 코랑 뺨이 빨게졌네. 얼굴에 뭣 좀 바르고 그래."
"아니에요. 지금 오느라고 추워서 그래요. 추운 데 있다가 따뜻한데 들어오니까 그런 거지. 배고파요. 뭐 좀 먹어요."
"그래. 먹자. 그런데 엄마가 급하게 오느라고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어. 눈도 오고..."

군부대에 탕수육이 가장 맛있다고 소문났다는 중국집에서 탕수육과 자장면 등을 시켜먹는 아들. 그러고 보니 옆 탁자에는 치킨을, 그 옆 탁자에는 피자를, 또 그 옆 탁자에서는 족발을 시켜서 이미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맛이야 어떻든 군 위병소까지 점령한 신속배달 철가방의 위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탕수육을 맛있게 먹는 아들에게 조심스레 쿠웨이트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제라도 마음을 바꿔 지원을 철회하면 어떻겠느냐고 달래보았지요. 하지만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말라는 말처럼 아들 녀석은 계속 "탕수육이 진짜 맛있다"는 감탄사만 연발할 뿐 엄마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눈보라가 휘몰아 치는 군부대 앞 전경
눈보라가 휘몰아 치는 군부대 앞 전경김혜원
참으로 이상한 것은 집에서 전화 통화를 할 때와 지금 내 앞에 앉아 탕수육을 먹는 아들이 모습이 달라 보인다는 것입니다. 전화통화를 할 때는 무엇을 해도 불안하고 안타깝고 그저 애처롭기만한 아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군복을 입고 앉아 아빠와 내무반 이야기와 동기들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녀석을 보니 정말 군인은 군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 걱정 마세요. 저 멋진 공군이 되고 싶어요. 여기에 있어도 쿠웨이트에 가도 잘 해낼 수 있어요. 그리고 지원한다고 다 가는 것도 아니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요. 조국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세계평화를 지킬 수 있으면 더 좋잖아요. 눈 많이 오는데, 운전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짜식아, 니가 무슨 독수리 오형제냐? 로봇 태권브이냐? 엄만 네가 그냥 엄마의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엄마한테는 조국의 안전과도 세계평화와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들이란 말이야. 그거 아니? 이 웬수야."

아들과 헤어지고 부대 앞을 나서는데 한 헌병이 눈을 치우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가 가고 나면 아들도 눈을 치우러 나오겠지요.

세상을 온통 하얗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함박눈. 눈이 너무 좋아 겨우내 눈이 왔으면 하고 바라던 때도 있었지만 눈을 치워야 하는 아들을 생각하니 탐스럽게 내리는 눈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저렇게 눈이 많이 오면 우리 군인 아들들은 눈 치우느라 허리도 펴지 못 할테니 말입니다.

눈을 치워야 하는 군인들에게 눈은 반갑지 않은 손님입니다.
눈을 치워야 하는 군인들에게 눈은 반갑지 않은 손님입니다.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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