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시골장에 가보셨나요?

[달내일기 90] 양남장에서 재래시장의 그늘을 보다

등록 2007.01.09 16:47수정 2007.01.0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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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양남장 바로 앞에 펼쳐진 바다. 장도 보면서 바다 구경도 할 수 있는 아주 배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양남장 바로 앞에 펼쳐진 바다. 장도 보면서 바다 구경도 할 수 있는 아주 배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 정판수

달내마을에서 장을 보려면, 근처에 가게가 없으므로 5일만에 서는 장을 찾아가야 한다. 이곳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경주시 양남면에 속하지만 가깝기는 입실(외동읍)이 더 가깝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가도 되는데, 입실에선 3일·8일이 장날이고, 양남에선 4일·9일에 장이 선다.


그런데 마을 어른들을 가만 보니까 가깝고 더 크고 하루종일 서는 입실장보다 멀고 오전에만 잠깐 서는 양남장을 더 이용한다.

@BRI@왜 그러냐고 여쭤봤더니 "늘 그랬으니까"와 "양남에 사니까 양남장을 이용한다", "간 김에 양남농협과 면사무소를 이용할 수 있으니까"라는 답이 왔다.

두 시장을 몇 번 다녀보니까 한 가지 차이점이 눈에 띄었다. 입실장은 전문장사치들이 좀 많은 데 비하여, 양남장은 직접 밭에서 재배한 남새를 내다 놓는 시골할머니들도 많이 보인다는 것.

우리 부부는 특별히 어느 곳을 선호하기보다 짬이 날 때 장날과 일치하면 그곳에 간다. 오늘 특별히 살 건 없었으나 가을 이후로 하도 장에 가본 지 오래돼 한 번 들러 보고 싶었다.

장을 소재로 한 수많은 시와 소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장은 사람들의 살아 있는 모습을 가장 여실히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여야 했다.


a 닷새만에 선 장날이지만 좌판 앞에 기웃거리는 이는 물론 지나가는 손님도 별로 없다.

닷새만에 선 장날이지만 좌판 앞에 기웃거리는 이는 물론 지나가는 손님도 별로 없다. ⓒ 정판수

그러나 장은 장이 아니었다. 봄 여름 가을보다 갖다놓은 게 아무리 적다 해도 장사치에 비해 손님이 너무 적었다.

겨울이라는 추운 날씨 때문에 그러는가 싶어 엿 파는 할머니께 여쭈었더니, "오데예, 마 우찌 된 일인지 통 손님이 없어예" 하셨다.


이어지는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해가 갈수록 손님이 없다는 거였다. 몇 년 전에는 아무리 추워도 지나가려면 사람과 사람끼리 부딪히는 게 예사였는데, 재작년부터는 손님이 뚝 끊어졌다는 거였다.

정말 사진 찍기 수월하도록 해주려는 배려(?)인지 손님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a 왼쪽엔 엿인데 할머니들께서 일주일 정도의 공을 들여 만드신 것이며, 오른쪽의 예쁜 무늬의 청국장도 손수 만드신 것이다.

왼쪽엔 엿인데 할머니들께서 일주일 정도의 공을 들여 만드신 것이며, 오른쪽의 예쁜 무늬의 청국장도 손수 만드신 것이다. ⓒ 정판수

이왕 온 김에 뭐라도 사 가려고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생선과 해초류를 파는 가게 앞을 지나치는데, 언뜻 모자반으로 보이는 게 눈에 띄어 저녁에 한 번 무쳐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할머니께 여쭈었다.

"이 모자반 어떻게 파세요?"
"이간 모자반이 아니고 진저리라 안 하능교."


'진저리'라고 하기에 하도 이름이 희한하여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왜 이름이 진저리냐고 다시 여쭈었다.

"아, 이 추운 저실(겨울)에 바닷속에 들어가 딸라몬 올매나 춥것소? 진저리가 안 나것소?"

하도 재미있는 해석에 할머니께 사진 한 장 찍어도 되겠느냐 하자, "말라꼬 쭈구렁탱이 할망구 사진을 찍을라능교?"하면서도 포즈를 잡아주었다.

a 해초인 진저리를 파는 할머니. 할머니 앞의 왼쪽 소쿠리에 담긴 건 다시마 채며, 오른쪽에 담긴 게 진저리다.

해초인 진저리를 파는 할머니. 할머니 앞의 왼쪽 소쿠리에 담긴 건 다시마 채며, 오른쪽에 담긴 게 진저리다. ⓒ 정판수

시장 분위기를 그나마 맛본 건, 옷가게 앞을 지나치려 할 때 내 앞에 가던 할아버지와 맞은 편에서 오던 할아버지 두 분을 만나면서였다. 이미 막걸리 몇 잔을 걸쳤는지 불콰한 낯빛의 두 분은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이인 듯 누구라 할 것 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야 이 문디야, 아즉 안 죽고 살아 있은갑네."
"이 쌔가 만 발이 빠져 디질 놈아, 니 두고 와 내가 몬저 죽을 끼고."
"조게 조디가 팔팔한 거 본께네 아즉 한 이십 년은 더 살 것다."
"그래 내사 배라빡에 똥칠할 때까정 살 끼다."


말투만 들으면 두 사람은 철천지원수 같으나 실상은 더 없이 다정한 친구 사이인데, 반어적으로 욕으로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a 시장 뒷전에서 직접 재배한 남새들을 내다 파는 할머니에게도 오가는 이가 별로 없다.

시장 뒷전에서 직접 재배한 남새들을 내다 파는 할머니에게도 오가는 이가 별로 없다. ⓒ 정판수

그 분위기도 잠시 시골장의 한적함이 자꾸 눈에 걸렸다.

여기도 제법 큰 유통회사가 시장 바로 앞에 들어와 있으니 사람들은 재래시장보다 거길 더 이용하는 것 같다. 매스컴 등에서 재래시장을 살리자는 프로그램을 본 적 있지만 정말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달리 팔 기회가 없는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거친 손을 헤쳐 일궈 거둔 농산물이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사장돼 버릴 수밖에 없다면 정말 큰일이다.

삶의 향기가 느껴지는 시골장이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특히 도시인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사는 곳 주변의 5일장 날을 꿰고 있어 휴일에 드라이브도 할 겸 시장 보러 온다면 얼마나 좋으랴.

장은 오늘도 살아 있고, 내일도 살아 있어야 하기에.

덧붙이는 글 | 양남장을 보려면 경주시 양남면을 찾아 유일하게 신호등이 있는 네거리에서 바다 쪽으로 들어오면 됩니다. 그리고 장날은 4일, 9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양남장을 보려면 경주시 양남면을 찾아 유일하게 신호등이 있는 네거리에서 바다 쪽으로 들어오면 됩니다. 그리고 장날은 4일, 9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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