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걱정 안하고 살 때가 가장 좋았지러~

사과 팔아 번 돈을 요 밑에 깔고 잔 우리 부모님, 그 때 기분이 어땠을까요?

등록 2007.01.30 11:33수정 2007.01.30 14:3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다지 배곯고 산 거 같지는 않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 어릴 때는 참말로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었던 거 같다. 아침에 길에서 어른을 만나면 "밥 잡사심니꺼"하면서 인사를 드렸고, 어른들도 "오∼이야 니도 밥 묵었나?"하시면서 인사를 받으셨다. 배부르게 밥 먹고 사는 거 이상으로 더 바랄 게 없는 그런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해 전에 친정아버지가 오셨을 때 물어봤다.

"아부지요, 아부지는 이때까정 살아오면서 언제가 제일 좋아심니꺼?"

이런 질문을 받으면 보통은 '언제 뭐했을 때가 가장 좋았다거나, 아니면 뭐 뭐 했을 때가 가장 좋았다'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텐데 우리 아버지는 이래 말했다.

"사과밭에서 돈 좀 나오고 밥걱정 안 하고 살 때, 그때부터 살만 했지러."

무슨 대단한 대답을 기대했던 나는 일순 실망했지만 그 말씀이 가장 정직한 대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밥걱정 안 하고 살 때부터 살만 했다

@BRI@우리 동네에는 사과 농사를 짓는 집이 두 집 있었다. 그 시절엔 사과밭이 있는 집은 부자 축에 들었다.


사과밭은 아이들이 여름이면 물놀이하던 방천 근처에 있었다. 사과밭 둘레에는 촘촘하게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다. 여름에 물놀이하다가 보면 배도 고프고 입도 심심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사과밭 주변에서 괜히 얼쩡거리곤 했다.

사과나무 밑에는 떨어진 사과들이 두어 개씩 나뒹굴고 있었다. 아직 채 맛도 안 든 시퍼런 사과였지만 어린 우리들은 그거라도 하나 얻어먹으려고 얼쩡거렸다.

가을이 되면 사과밭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새빨갛게 익어서 절로 침 삼키게 했던 새콤달콤한 홍옥을 한 입 베어 물면 새콤하면서도 향긋한 사과 향이 입 안 가득 차올랐다.

서리가 내릴 때쯤인 늦가을이 되면 껍질이 좀 두툼한 국광이 익어갔다. 저장이 안 되는 홍옥과는 달리 국광은 겨우내 보관할 수 있었다. 사과밭이 있던 우리 큰 집에는 사과를 보관하는 광이 따로 있었다. 그 광에는 국광 담은 나무궤짝이 천장까지 닿도록 쌓여 있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6학년 올라가던 그해 봄에 우리 집도 사과밭을 갖게 되었다. 산 밑 열 마지기 너른 밭에 드문드문 사과나무 묘목을 심었다. 날마다 아버지는 밭에 가셨다.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더 굵은 어린 사과나무를 아버지는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시곤 했다.

엄마 아부지는 눈만 뜨면 사과밭에 가서 살았다. 우리 사과밭은 돌이 많은 산 밑 밭이라서 매일 돌 골라내는 게 일이었다. 아버지는 곡괭이와 삽으로 사과나무 둘레를 빙 돌아가면서 구덩이를 팠다. 아버지가 구덩이를 파면 엄마는 돌을 골라내었다. 그리고 구덩이에 거름을 듬뿍 묻어주었다.

사과 팔아서 번 돈을 요 밑에 깔고 잔 우리 부모님

학교 갔다 오면 밭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께 갖다 드릴 중참을 만드는 게 내 일이었다. 중참이라야 다른 게 없었다. 만날 밀가루전과 물 한 주전자가 다였다.

'밀가리(밀가루)'를 물에 풀고 사카린을 조금 넣고 프라이팬에다 밀가루전을 부쳤다. 얇은 프라이팬은 조금만 잘못해도 밀가루전이 눌었다. 그래서 석유 곤로(풍로) 심지를 잘 조정하면서 밀가루전을 부쳤다.

낮은 곳엔 논이 있었고 높은 곳엔 밭이 있었지요. 산 밑 열 마지기 우리 사과밭은 산그늘도 빨리 졌어요.
낮은 곳엔 논이 있었고 높은 곳엔 밭이 있었지요. 산 밑 열 마지기 우리 사과밭은 산그늘도 빨리 졌어요.이승숙
집에서 나와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우리 열 마지기 밭. 아버지는 곡괭이로 땅을 파시다가 "아부지요∼"하는 내 소리에 "오∼야"하시면서 구덩이에서 나오셨다. 돌 골라 갖다 버리느라 힘들었을 엄마도 머릿수건을 벗어 옷을 탁탁 털면서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맞으셨다. 우리 셋은 땅바닥에 둘러앉아서 밀가루전을 먹었다.

사과농사가 제대로 되어서 돈을 막 만지기 시작했을 때 사과 팔아서 산 돈을 엄마 아부지는 하루 저녁 담요 밑에 깔고 잠을 잤단다. 돈에 포원(抱寃)이 져서 일부러 그래 해봤다고 한다. 돈 깔고 잔다는 말이 있더니 우리 엄마 아부지가 진짜로 그랬던 거다. 엄마 아부지는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었을까.

나중에 우째(어떻게) 알았는지 이웃 사람이 물었다.

"잇살띠기요, 돈 깔고 자이 어떻던교?"

한창 청년기의 사과나무에서 돈이 막 쏟아져 나왔을 때, 늦도록 밭에서 일해도 엄마 아부지는 힘든 줄을 몰랐단다. 돌이켜 보니 사과나무와 함께 우리 집도 그 시절이 가장 번성했던 거 같다.

사과나무와 함께 했던 우리 집,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한다

그렇게 울울창창했던 사과나무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하나 사그라져 갔다. 햇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짜여서 우거져 있던 사과밭이 어느샌가 머리숱 빠진 중늙은이 머리처럼 숭숭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몇 해 더 지나 사과나무를 다 베어내고 말았다.

사과나무의 쇠락과 함께 우리 집도 기울기 시작했다. 내 몸 안 아끼고 장정처럼 일하던 우리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거였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우리 부모님이 알뜰살뜰 모았던 재산들이 솔솔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논밭전지를 정리하려고 아버지가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웃대 어른들로부터 아부지 엄마에 이르기까지 땀과 눈물로 만들어졌을 논밭전지들. 그 어느 것 하나 마음 안 가는 게 있으랴만 그중에서도 특히 닷 마지기 논과 열 마지기 밭은 우리에겐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서 남동생은 아버지에게 간절하게 말씀드렸다 한다. 그 밭은 엄마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밭이니 놔두고 싶다고 말씀드렸단다. 그래서 열 마지기 사과밭은 우리 곁에 남게 되었다.

재작년 겨울에 친정 집에 갔을 때 일부로 열 마지기 밭에 올라가 보았다. 근처 밭에는 산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살아평생 밭에서 살던 사람들이 죽어서 밭 근처에서 쉬고 있었다.

우리 밭도 쉬고 있었다. 밭에는 드문드문 감나무 애동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열 마지기 밭은 다시 일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4. 4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5. 5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