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경내. 철쭉나무 고목이 이 절집에 고인 오랜 세월을 말해 준다.장호철
선암사는 백제 성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528년)한 절이다. 뻔히 교과서에서 배운 거지만, '백제'라는 이름 앞에 영남에서 온 여행자는 여기가 호남이라는 걸 실감한다. 창건 이후 도선국사, 대각국사 등 수많은 선승을 배출해, '선암사 선방 수좌는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어떤 사찰에서도 입방이 허락'될 만큼 선방으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해를 넘겨 진행되고 있는 신구 주지간 싸움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은 착잡하다. 지난 1월 11일 오후 늦게 선암사를 찾았을 때, 산사는 평온하기만 했다. 저잣거리의 대중들이 수행자를 바라보는 눈높이를 감안하면 승려들이 사찰의 운영을 두고 벌이는 때아닌 활극은 이 절집이 일천오백 년 동안 쌓아온 선방으로서의 아름다운 이름을 일거에 무화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한바탕 눈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잔뜩 흐린 날씨였고, 시간을 놓치면 어두워져 제대로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조바심으로 서둘러 경내를 돌았다. 대웅전 앞뜰을 지나 무우전, 장경각을 돌아 무량수전과 해천당을 거치는 길이었다. 절집을 찾은 대중들이 적지 않았지만, 경내를 돌면서 나는 문득 이 낡은 절집을 덮고 있는 게 60, 70년대의 시공간, 그 온기라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