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가족, 만두 열 알이 구하다

하찮은 카메라가방 때문에 가족 행복도 '일촉즉발'

등록 2007.02.05 21:15수정 2007.02.0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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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금메달받은 작은아들과 기뻐하는 가족들

금메달받은 작은아들과 기뻐하는 가족들 ⓒ 유대영

어제(4일)는 우리 집에 희비가 두 번이나 엇갈린 하루였다. 둘째이자 막내인 중3 짜리 아들이 서울시 복싱 신인왕대회에서 중등부 금메달을 차지하여 온 가족이 오후 내내 들뜬 분위기였다. 이만하면 출발은 상큼했다.


아들은 몇 달 전 스스로 동네 복싱 체육관에 등록하여 주로 늦은 밤에 운동을 하곤 했다. 내가 종합격투기 애호가라서 늘상 함께 심야까지 TV에서 K-1이나 복싱 명승부전을 보았던 것이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속으로는 작심삼일이겠거니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진득하게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얼마 전에는 운동에 별 취미가 없는 고1 짜리 형을 복싱에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형제가 나란히 복싱 체육관을 출입하게 되어 집안에 난데없이 복싱 바람이 불게 된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신인왕대회에 출전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내심 놀라면서 출전만으로도 아들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것이 급기야는 금메달로 이어졌으니 집안에 경사라면 경사인 셈이다.

신인왕전 금메달 기쁨도 잠시...

@BRI@작은 성취라도 성취의 경험은 값진 것이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응원을 나갔던 보람을 만끽했다. 비록 올림픽은 아니지만 둘째가 따낸 금메달을 온 가족이 번갈아 만져보고 벙실벙실 웃으면서 사진도 함께 찍고 난리가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는 여신은 변덕쟁이인가? 우리 가정의 그 조그마한 행복을 현장에서 짓밟아버린 사건이 곧바로 발생하고 말았으니, 그것은 바로 카메라 가방 분실 사건이었다. 가방 하나 잃어버린 것 가지고 가정의 행복 운운하다니, 이 무슨 과장법인가 할지 모르겠지만, 이 사소한 사건이 당시로서는 아찔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말았다.


기념사진 촬영을 마치고 막 체육관을 나서는 순간 카메라 담당인 큰아들이 "아 참! 카메라 가방!"이라고 외쳤다. 승리에 들뜬 나머지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가방 속에는 엊그제 새로 산 카메라의 잭을 비롯한 온갖 부속기기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온 가족이 다시 뛰어들어가 그것을 놓아두었던 곳부터 시작해서 체육관 여기저기를 다 뒤지고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누군가 가져간 것이다. 순식간에 승리의 기쁨은 사라지고 잃어버린 가방 생각 때문에 집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우리 아들들이 평소 새로 산 물건을 잘 망가뜨리거나 잃어버리는 데 큰 불만이 있었다. 카메라만 해도 멀쩡한 것을 고장 내서 겨우 고쳐놓았는데 또 고장이 났다. 거액을 내고 수리하느니 차라리 새것 사는 것이 낫다고 해서 새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부속기기들을 잃어버렸으니 나로서는 화가 날 만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엄중하게 경고하고 나서 한 마디를 던졌다.

"카메라 본체도 언제 절단내 버릴지, 몇 날이나 갈지 모르겠다."

나의 이 말이 성질 급한 큰아들을 자극했다. 아들놈은 역전의 찬스를 잡은 듯이 거세게 치고 나왔다.

"촬영을 하기 위해 카메라 가방을 한쪽에 놓아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가져간 놈이 잘못이지 놔둔 사람이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일촉즉발, 큰아들과 말다툼을 벌이다

요지는 대강 이상과 같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말투는 거칠어서 나의 기분을 건드렸다. 큰놈은 말미에 "카메라고 뭐고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그 어떤 분의 말이 생각났다. '이거 막가자는 겁니까?' 아들놈이 카메라를 내던지기 전에 빼앗아서 내 손으로 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순간 나를 지배했다. 만일 제3자가 보았다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요 부자가 똑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운전을 하던 아내가 말린다고 끼어들더니 도리어 싸움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이때 금메달을 딴 둘째 아들이 어른스럽게 한마디했다.

"우승하면 체육관 회비 평생 면제해 준다고 했으니 그 돈으로 가방을 사면 되잖아요? 이제 그만들 하세요."

어린놈이 금메달을 따더니 싸움 말리는 것도 금메달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둘째놈 보기가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금메달 기분을 망치는 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꽉~ 꽉~ 누르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아! 사소한 일도 관리를 잘못하면 이렇게 번지는구나. 인생은 순간순간이 위기의 연속이야. 행, 불행이 손바닥과 손등처럼 붙어 있는 거로구나. 큰아들이 사진 찍느라 제 나름으로는 동분서주하느라 깜빡 실수했고 스스로 미안한 표시를 한 것을 가지고 내가 너무 나간 거야. 아들놈도 컸다고 맘대로 되지 않는데, 아들 교양도 잘 시켜야 하겠고, 그보다는 나부터 더욱더 수양을 해야 하겠구나. 화를 참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우리 집안의 부끄러운 에피소드를 굳이 공개하는 것은 뼈아픈 교훈을 되새김과 아울러 다음 이야기를 꺼내기 위함이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은 고요해졌다.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덜컥하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한성'이라는 만두집이었다. 과천에서 양재 인터체인지 가는 길에 있는 식당이다. 몇 년 전 우연히 들렀다가 만두 맛에 반하여 지나는 길에 가끔 들르곤 하는 집이다.

"어? 만두 알이 10개밖에 없던데..."

아내가 만두전골을 시켰다. 별 대화도 없이 그저 먹기만 했다. 예전엔 그렇게 맛있던 음식이 그저 그렇게만 느껴졌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와는 달리 아들들은 맛있게 먹는 눈치였다. 얘들은 얘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럭저럭 다 먹을 무렵 나는 만둣국을 사가지고 가자고 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별 뜻 없이 던진 말이다. 아내는 만둣국 2인분을 싸달라고 주문하면서 아이들에게 더 먹고 싶으냐고 묻고 접시만두를 1인분 추가했다. 이 집의 만두는 왕만두가 아니라 큰 밤톨 크기인데 기성품을 사다 쓰지 않고 직접 빚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먹어본 만두 가운데 으뜸이다.

잠시 후 접시만두가 나왔다. 이때 아내가 여종업원에게 물었다. "만두 1인분이 몇 개예요?" 나는 웬 뚱딴지같은 질문인가 의아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접시만두는 열한 개고 만둣국은 열 개예요." 만둣국은 국물이 있으니까 만두가 한 개 빠진다는 말씀이다.

'그래,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빙긋 웃음이 나오려는 순간 전혀 예상 못 했던 아내의 한 마디가 나왔다. "지난번에 만둣국 2인분을 싸 가지고 갔는데 만두 알이 열 개밖에 없었거든요." 1년도 훨씬 지난 과거사를 꺼낸 것이다.

나는 당시의 일이 떠오르면서 그 일 자체보다도 순간 걱정이 앞섰다. '이러다 주인과 옥신각신 시비라도 붙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증거도 없는데다 이런 류의 싸움에 능하기는커녕 이런 일은 마음 약한 아내의 스타일이 전혀 아닌데,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가? 더구나 오늘은 일진도 좋지 않은데, 만일 시비가 붙으면 어떻게 뒷감당하나? 나는 얼굴 팔린 죄로 숨어야 하나 아니면 안면몰수하고 나서서 어떻게라도 해야 하나?' 찰나에 만 가지 걱정이 머리를 스쳤다.

분위기를 바꾼 만두 알 10개

a 행복을 지켜준 만두 열알

행복을 지켜준 만두 열알 ⓒ 유대영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상냥한 대답이 나왔다. "아, 그래요? 사장님께 여쭤 보겠습니다." 나도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금방 중년의 여사장님이 와서 말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오늘 만두 열 개를 더 싸드리고 국물도 더 드리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어이구,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여사장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계산할 때 여사장은 또 한 번 미안하다고 했고 나 역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와서 집으로 향했다.

사실 이럴 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 집 사장처럼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그로 인해 조금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대중음식점을 경영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상대해야 하고 그 바쁜 와중에 좋은 인상으로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집을 나서면서 솔직히 아쉽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1년여 전 2인분을 싸가지고 가서 다음날 아침 우리 4인 가족이 먹으려고 하는데 작은 만두 알이 열 개뿐이어서 순간 당황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실수로 덜 주었던 만두 알 열 개에 대해 이자를 쳐서 만두알 한두 개쯤 더 주었다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이것 역시 손님으로 꽉 찬 바쁜 상황을 감안하면 나의 사치스런 기대일 수 있으리라. 그래서 재미로 하는 말이지 꼭 섭섭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튼 식당을 나와서 집으로 향하는 차 안의 분위기는 확 달라져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금메달을 따가지고 가는 당당한 귀갓길의 분위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 인간은 이처럼 작은 일에 흔들리는 가벼운 존재라는 말인가? 하찮은 가방 하나가 가정의 행복을 깨뜨릴 수도 있고, 작은 만두 알 열 개가 자칫 깨질 뻔한 행복을 복원시켜 줄 수도 있음을 실감케 한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유종필 기자는 민주당 대변인입니다.

덧붙이는 글 유종필 기자는 민주당 대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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