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펼치면 절대로 중단할 수 없는 무서운 소설

[서평] 미야베 미유키 <이유>

등록 2007.02.14 19:37수정 2007.02.14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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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미야베 미유키 <이유>

미야베 미유키 <이유> ⓒ 청어람미디어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 밤의 살인사건 이야기. 처참하게 난자당한 시체들이 널려있는 초고층 아파트 25층.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면서 나는 문득 흠칫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제히 불이 꺼진 앞동, 14층의 어느 한 집에서만 선명하게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집안에서 진한 눈썹의 일본 여자가 도끼를 들어 일가를 내리치고 있는 장면이 자꾸만 상상이 되어 나는 몸서리를 쳤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읽으면 왜 몸서리를 치게 될까. 그의 소설엔 귀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읽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범인이 누구일지 손에 땀을 쥐고 이야기를 따라가게 하는 전형적인 추리소설도 아니다. 그보다는 시대상의 면면을 차분하게 보여주다가 어느 순간 보여주었던 모든 장면들을 하나의 커다란 벽화로 통합하는, 고전적인 서사양식을 따라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의 소설을 읽으면 흠칫하고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게 될까.


그것은 평범한 우리네 이웃에, 혹은 나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범죄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살인이란 특별히 정해져있는 아주 나쁜 사람들만 저지르는 게 아니라 평범한 나도, 사랑에 가득 차 보이는 이웃집의 따뜻한 아줌마도 어느 순간 특정한 상황에 내몰리면 순식간에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이 작가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025호에 그런 사정이 생기고 명도를 둘러싸고 스나카와 씨들과 내가 지루하게 교섭을 하고…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야시로 유지는 나한테 돈을 뜯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그런 판단이 그 자를 미쳐버리게 했겠지요. 그저 염치 모르는 별난 건달로 끝났을지도 모르는 인간이 목돈을 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황당할 정도로 무서운 짓을 저지를 수 있게 된 겁니다.

미야메 미유키의 소설이 다른 추리소설과 차별화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살인자는 원래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라는 시사성 가득한 작가의 메시지. 도대체가 서로 연관성이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은 일상의 작은 삽화들이 어떻게 연결점을 가지고 살인으로 이어지게 되는지를 지켜보다보면 이 작가에게 쏟아졌던 수많은 감탄사들을 한순간에 모조리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장면 하나하나에서 보석처럼 등장하는 치밀한 심리묘사이다.

그리고 아야코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은 야시로 유지라는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다. 아야코가 잘라내는 것은 그를 사랑하게 된 이후로 내내 품어왔던 따뜻한 감정이나 밝은 미래를 향한 꿈이다. 그렇다. 아야코는 자기 마음의 한 조각을 떼어내 버리는 것이다.


아기의 아버지인 야시로가 누나와 결혼할 마음이 없음을 부모에게 알리는 모습을 보며 아야코의 동생이 누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장면이다. 떨어져 나가는 것은 한 인간이 아니라 자신이 품었던 따뜻한 마음 한 조각… 이 단락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 아닌가.

@BRI@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과거'라는 것을 야스타카는 깨달았다. 이 '과거'는 경력이나 생활 이력 같은 표층적인 것이 아니다. '피'의 연결이다. 당신은 어디서 태어나 누구 손에 자랐는가. 누구와 함께 자랐는가. 그것이 과거이며, 그것이 인간을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만든다. 그래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를 잘라낸 인간은 거의 그림자나 다를 게 없다. 본체는 잘려버린 과거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 단락은 수첩에 적어 넣고 다니면서 두고두고 되뇔법한 '경구'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 최고로 잘 나간다는 이 작가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 도서관에 세 번씩이나 갔었다. 그때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모조리 대출중이었다. 어느 한 작품도 남아 있는 적이 없었다. 출판된 지 오래된 작품도 그랬고, 신간도 그랬다. 그 책을 대출해간 독자들도 모두 이 장면에서 가슴 한 구석이 찡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그녀의 책을 모조리 섭렵하려 들었겠지. 그래서 대출이 힘들었구나.

작가는 살인사건 하나를 놓고 수많은 화두를 던진다. 초고층 아파트로 대변되는 현대문명의 이기성, 해체되어 가는 가족의 의미, 자본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 부동산 경매제도의 부작용, 버블붕괴가 일본인들의 정서에 미친 영향... 그리고 이 수많은 화두를 풀어가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는 거의 마술사와도 같다. 특히 초고층 아파트에 사는 가족들의 양상과 부자는 아니지만 서로를 따뜻하게 지지해주면서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서민 가족들의 대비는 이 작품의 백미를 이룬다.

혹시 미야베 미유키를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기대를 잔뜩 품고 당장 읽어보시라. 기대하고 보는 영화나 책은 대부분 실망하게 마련이라지만 이 작가만큼은 예외이다. 그녀가 그려내는 방대한 일본의 사회상에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끝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만나게 되는 수많은 인간군상들... '현대 일본의 빛과 어둠을 드러내고, 사회와 인간을 폭넓게 그린 발자크적인 작업'이라는 나오키 상 수상작 평가가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한다.

한가지, 적어도 3시간 정도는 확보된 상태에서 책을 펼쳐야 한다. 혹시 30분만 읽다가 잘 예정이라거나 지하철에서 잠깐 짬을 내서 볼 요량이라면 당신은 다음으로 예정된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한 번 펼치면 절대로 중간에서 덮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소설이므로.

이유

미야베 미유키 지음,
청어람미디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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