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할아버지 못보셨나요?

시골장터 골목에서 아버지를 잃다

등록 2007.02.15 16:12수정 2007.02.15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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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보다 논바닥에서 타는 썰매가 더 재미있다는 아버지.
스키보다 논바닥에서 타는 썰매가 더 재미있다는 아버지.김혜원
"명절 밑에 구경은 무슨 구경이냐?"
"막내딸이 갑자기 시간이 생겨서 모시고 간다잖우. 시골 가면 장 구경도 하고, 명절 장도 거기서 보고 그러자구요."



지난 13일. 직장에 다니는 탓에 평소에 부모님과 여행을 하기 어려웠던 막냇동생이 모처럼 주중에 휴가를 내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에 있는 스키장을 다녀왔습니다.

스키는커녕 눈썰매도 못 타신다면서 안가겠다고 손을 내저으시는 부모님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법은 있지요.

손자들의 노는 모습도 보시고 스키장 안에 있는 물놀이 시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함께 가시자고 조를 때는 꿈쩍도 않으시던 분들이 스키장 근처 시골장 이야기를 해드리니 얼른 준비를 하십니다. 시장구경을 싫다 하시는 노인분들은 거의 없거든요.

아이들이 스키를 타러 나간 시간 창 밖으로 시원하게 설원을 질주하는 스키어들을 바라보시던 부모님이 지루하셨던지 장 구경을 조르기 시작하십니다.

@BRI@"개미새끼들 같구먼. 새까맣게 내려오네. 논바닥에서 썰매 지치는 건 공짜구먼. 뭐할라고 돈 써가며 저러는지 모르겠다."
"영감, 논바닥에서 썰매 타는 거 요즘 애들이 알기나 해요. 우린 뭔 재미로 살았던지 몰라. 참 요즘 사람들은 재미도 새록새록이지. 니들은 좋은지 몰라도 늙은이들은 재미없으니까 장 구경이나 시켜줘라."



집을 출발할 때부터 시골 장 구경에 마음을 빼앗긴 부모님 눈에 설원을 내달리는 스키어들이 들어올 리 없습니다. 그저 얼른 시골장터에 가서 구경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지요.

차를 몰고 스키장을 빠져나왔지만 생각과 달리 시골장을 찾는 것을 쉽지 않습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르고 내리며 한 시간이 넘게 헤맨 끝에 도착한 시장. 생각보다 제법 큰 규모였습니다.


우체국, 교육청, 등기소가 있는 것을 보면 홍천읍쯤 되는 것도 같아 보입니다. 설날을 앞두고 명절장을 보기로 작정을 하고 오신 엄마는 오래 전부터 잘 아는 동네인 것처럼 앞서서 시장골목으로 들어가시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차에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아버지 역시 엄마의 뒤를 바로 따라가시며 혹시라도 주차위반에 걸릴지도 모르니 차에서 기다리라고 당부를 하십니다.

그리고 한 시간이 흐르고, 또 삼십분이 지나는 시간 아무래도 시장통에서 길을 잃으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찾아 나서보려다 길이 엇갈릴까 걱정되어 다시 차로 돌아오기를 몇 번. 오후 네시를 넘어서면서 흐려진 하늘에서 한두 방울씩 비까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무슨 장을 이렇게 오래 보시는지? 혹시 길을 잃으신 건 아니겠지?'

혼잣말을 하고 있는데 멀리 커다란 검정 비닐봉투를 머리에 이고 걸어오는 엄마의 모습이 보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짐을 받고 보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스키는 못 타도 찜질은 좋아하시지요.
스키는 못 타도 찜질은 좋아하시지요.김혜원
"아버지는?"
"아버지 나보다 앞서가셨다. 안 오셨냐? 짐이 무거워서 너 데리러 간다면서 벌써 삼십분도 전에 가셨는데…."
"안 오셨어요. 어딜 가셨지?"
"나도 기다리다 하도 안 와서 무거운 짐을 이렇게 이고 온 거야. 어쩌냐, 니 아부지 잃어버렸나부다. 이를 어쩌냐."


아버지는 엄마와 헤어져 나를 찾아오는 도중에 길을 잃어버리신 모양이었습니다. 엄마와 헤어졌다는 정육점 앞을 세 번이나 오고 갔지만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 혹시 길을 잃은 할아버지 못 보셨나요? 베이지색 점퍼를 입으셨구요. 머리는 하얗거든요."

그때부터 엄마와 저는 시장통 사람들을 붙잡고 아버지를 못 봤느냐고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을 걸어서, 뛰어서 그리고 차를 타고 시장을 열 바퀴도 더 돌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날을 저물어가고 비는 점차 굵어지는데, 핸드폰도 신분증도 지갑도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은 아버지를 낯선 도시의 장터에서 잃어버리다니 정말 눈앞이 캄캄합니다.

치매 때문에 평소에 기억하고 있던 주소나 전화번호도 자꾸 잊어버리시는 아버지이신데, 더구나 당황하면 가지고 있던 기억마저도 모두 뒤죽박죽 혼란을 일으키시는 것이 치매의 일반적인 증상인데…. 가족을 잃고 얼마나 당황하고 막막하실까 생각을 하니 속이 상해서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날은 저물고…. 파출소에 신고를 해야지. 정이 못 찾으시면 누가 파출소에라도 데려다 주지 않겠냐? 파출소를 찾아가보자. 아무래도 우리를 찾는다고 이리저리 헤매다니다가 너무 멀리까지 가버린 모양이야. 일단 신고를 하고 콘도에 돌아가서 기다려봐야지. 거기서도 왜 안오나 다들 기다리고 있을텐데…."
"예, 마지막으로 한 바퀴만 더 돌아보고…."


낯선 장터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더라면 이런 행복은 있을 수 없었겠지요.
낯선 장터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더라면 이런 행복은 있을 수 없었겠지요.김혜원
파출소에 신고를 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시장 주변을 돌아 파출소로 가려던 길이었습니다. 사거리를 돌아 건널목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득 길 옆 불이 훤하게 켜진 건물에 눈이 갔습니다. 막 문을 닫으려는 우체국 건물 안에 노인 한 분이 청원경찰을 붙잡고 뭔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아… 아부지닷. 엄마. 아부지예요. 저기 저 우체국안에…."
"어머, 정말. 아이구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이구 저 영감이 왜 저기 있냐?"


어떻게 차에서 내려 우체국까지 뛰어갔는지는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저 아버지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며 마구 달려갔으니까요.

"아부지! 아부지! 어디 가셨었어요. 얼마나 찾았는데…. 아부지이∼"
"아휴∼ 우리 식구 찾았구나. 아휴∼ 찾았어…."
"영감∼ 어딜 그렇게 다녔어요. 얼마나 힘들었어요. 눈이 다 쾡하네. 여보 고마워요. 이렇게 찾게 해줘서 고마워요. 당신 잃어버렸으면 어쩔 뻔했어.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찾아줘서 나도 고마워. 얼마나 걸었는지 다리가 아파 죽겠어. 날은 어두워지고 비는 오는데 식구는 잃어버리고 전화가 있나 주머니에 돈이 있나? 큰일났더라구…. 찾았으니 다행이다."


세 식구는 저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서로 얼싸안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를 안아본 것이 언제였던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가족을 찾아다니시느라 힘이 드셨던지 아버지는 저녁을 드시자마자 이내 코를 골며 잠이 드셨습니다. 함께 힘이 드셨던 엄마 역시 아버지 곁에 곤하게 잠이 드셨습니다. 명절 밑에 효도를 한답시고 스키장에 모시고 왔다가 낯선 장터 바닥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더라면 어쩔 뻔했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합니다.

이번 일로 우리 가족은 또 하나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어딜 가든 절대 아버지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치매노인은 시간개념과 거리감각, 그리고 길 찾기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을 저와 엄마가 잠시 잊었던 것이 문제였답니다. 무사히 가족과 만나 즐겁게 설을 맞이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답니다.

"아부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길을 잃고 당황해 하시는 저희 아버지에게 잠시 쉬었다 가시라며 의자를 내어 주시고, 집에 가실 교통비까지 마련해 드릴테니 걱정마시라 위로해주신 젊은 내외분 감사합니다. 당황해 하시는 중에도 낯선 젊은 내외분의 관심에 큰 감동을 받으셨답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도 참 많다"는 아버지 말씀에 저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길을 잃고 당황해 하시는 저희 아버지에게 잠시 쉬었다 가시라며 의자를 내어 주시고, 집에 가실 교통비까지 마련해 드릴테니 걱정마시라 위로해주신 젊은 내외분 감사합니다. 당황해 하시는 중에도 낯선 젊은 내외분의 관심에 큰 감동을 받으셨답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도 참 많다"는 아버지 말씀에 저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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