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창자를 씹어먹을 고구려 노예놈!"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33] 수바스를 지나 카슈가르까지

등록 2007.02.24 19:50수정 2007.02.2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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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쿠차의 아침

쿠차의 아침 ⓒ 오창학

'바람부는 쿠차'

흐린 하늘과 모래 바람이 하루를 연다. 어제 세차한 백구의 몸에 사북이 모래가 앉았다. 2년치 황사를 하룻밤에 겪은 몰골이다.


@BRI@쿠차의 아침 시장을 지난다. 냉장 시설 없이 양고기를 걸어놓고 파는 풍경이 정겹다. 수바스 고성과 키질 석굴을 보고 카슈가르로 들어갈 계획이라 빡빡한 일정이건만 아침 출발이 다소 늦었다.

주유 중 정차한 차체가 모래 바람에 정신없이 흔들린다. 오늘도 고속주행의 기대는 싹부터 잘렸다. 길거리 오토바이들은 바람에 날릴 듯 비틀거리며 속력을 내지 못한다. 나귀 마차의 주인들도 바람을 피해 짐 위에 바싹 엎드려 있고 오로지 나귀만이 열 지어 가던 길을 간다. 그야말로 자동항법장치가 달린 현대판 교통수단이다.

9시 30분 수바스(蘇巴什) 고성을 향해 나서다. 모래 동반한 강풍으로 눈과 몸이 편치 않다. 톈산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사람을 날릴 만치 강하게 부는 길목이라더니 과연 허언이 아닌가보다. 이 모래바람 속에 근 3시간, 80여 km를 헤맨다. 지도엔 수바스 유적이 나와 있질 않다. 한국에서 구입한 실크로드 안내서의 약도는 217번 도로상 천산대협곡 전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기에 무작정 217번을 따라간 것이 화근이었다.

중국어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여의치 않아 길을 묻기도 어렵다. 도로는 공사로 파헤쳐 놓은 탓에 협곡 몇 개를 우회해야 했다. 지나친 곳을 다시 지나치는 고생 끝에 결정한 것은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자는 것. 결국 쿠차로 돌아와 50위안에 택시를 잡아 길 안내를 맡겼다.

a 약도 한 장만 믿고 수바시 고성을 찾아 나섰다가 톈산산맥 곳곳을 헤맸다

약도 한 장만 믿고 수바시 고성을 찾아 나섰다가 톈산산맥 곳곳을 헤맸다 ⓒ 오창학

'수바스에서 고선지를 느끼다'


이토록 허망할 수가. 택시를 뒤따라 도착한 곳은 쿠차 동북쪽 25km 지점 좌측 산기슭이었다. 도로표지도 없고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치라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찾질 못했다. 철조망 안에 '수바스불사유지(蘇巴什佛寺遺址)'란 작은 입간판이 없었다면 바로 옆을 지나면서도 모를 뻔했다.

a 수바스 유적임을 알리는 표석. 바람 부는 유적 앞의 백구

수바스 유적임을 알리는 표석. 바람 부는 유적 앞의 백구 ⓒ 오창학

'수바스'는 위구르 말로 '물의 원천'이란 뜻이다. 톈산산맥에서 발원해 흐르는 쿠차하(庫車河)가 한가운데를 관통해서 붙은 이름인가 보다. 바로 이곳에 고선지의 안서도호부가 있었다.


바람이 사정없이 차체를 때린다. 교수님과 아내는 차에서 내릴 엄두를 내지 못해 혼자서 유적지에 들어섰다. 허물어지다 남은 벽 사이로 바람이 모래를 감아 올린다. 그때마다 쉰 소리로 바람이 운다. 그 바람 사이로 노성이 들리는 듯싶다.

a 톈산산맥을 배경으로한 수바스 고성, 고선지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톈산산맥을 배경으로한 수바스 고성, 고선지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 오창학

"개의 창자를 씹어 먹을 고구려 노예 놈, 개똥을 핥아먹을 고구려 노예 놈!"(敢狗腸高麗奴, 敢狗屎高麗奴)

고선지가 하서(河西)로 돌아오자 그의 상관이었던 사진절도사 부몽영찰이 한 말이다. 4600m 탄구령을 넘어(한니발과 나폴레옹이 넘은 알프스는 2500m였다) 소발률국(小渤律國, Gilgit)을 점령하고 당의 세력을 서역에까지 뻗게 한 고선지는 이제 부하가 아니라 상전이 될 처지였다. 질시와 두려움이 변한 분노. '고구려 노예 놈', 나라 잃은 후예가 이국의 신민이 되어 겪어야 했던 수모였다.

톈진에서 예까지 달려오면서도 정리되지 않던 고선지에 대한 마음들. '그는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을까?', '서역 정벌의 당 영웅은 침략당한 도시국가들의 입장에서 가해자가 아닌가?'

그러나 이곳 수바스의 바람 속에서 갈피를 잡는다. 토번과 아랍, 그는 누가 뭐래도 '고구려 노예 놈'이었다.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한반도 출신의 장수였다.

비슷한 시대 신라인 혜초가 천축국을 순례하고 당으로 귀환할 때 이곳 안서도호부(安西都護部)를 경유했다. 때는 727년 11월. 이 무렵 고선지는 하급 장교로 하서(河西)에 있었고 1차 원정을 마친 747년이 되어서야 서역 정벌의 영웅으로 고선지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니 둘 사이의 인연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먼 훗날 해동의 후손 하나가 이 퇴락한 폐허 속에서 그들의 자취를 동시에 느끼고 있다. 1200여년 실로 멀고 긴 세월의 간극이다.

끼니도 해결하지 못한 채 키질 석굴로 향했다. 여분의 음식을 준비치 못했는데 217번 도로를 타는 듯하다가 바이성(拜城) 방면 가는 307번 도로로 가는 70여km 구간은 구릉 사이로 뻗은 길과 황량한 풍경이 전부일 뿐 인적을 찾을 길 없다. 이거 또 아침나절 수바스 고성을 찾던 때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할 때 키질천불동 가는 간판이 보인다.

'키질석굴과 한락연'

a 쿠차에서 70여 Km를 달려 키질석굴이 있는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백구 아래로 무자르트강이 흐른다

쿠차에서 70여 Km를 달려 키질석굴이 있는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백구 아래로 무자르트강이 흐른다 ⓒ 오창학

오후 2시. 유명한 유적지 치고 길이 좁다 싶은 곳을 가다 산을 넘으니 눈앞에 무자르트강이 흐르는 오아시스 풍경이 펼쳐진다. 오랜 행진 끝에 도착한 오아시스. 긴 세월 동안 이곳을 지났던 나그네들의 심정도 이랬을 것이다. 지난 길에 대한 안도와 남은 길에 대한 기대 혹은 염려로 머무는 곳. 그들의 소망과 신앙이 한데 어우러져 이곳 절벽에 저런 석굴을 조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키질석굴 매표소를 지나니 구마라습(鳩摩羅什;Kumarajiva)의 청동좌상이 제일 먼저 반긴다. 사실 반가운 건 내 마음일 뿐이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저 사색에 잠겨있을 뿐. 살포시 미소를 머금은 것 같은 입매는 흡사 어떤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한 표정이다.

a 사색에 잠긴 구마라습 청동좌상과 사암재질 석벽에 조성된 석굴

사색에 잠긴 구마라습 청동좌상과 사암재질 석벽에 조성된 석굴 ⓒ 오창학

인도 귀족인 아버지와 구자국(쿠차)왕의 여동생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7세에 불가에 출가한 그가 중국 장수 여광의 포로가 되었다가 장안에 이르러 종국에는 수많은 불경을 번역하고 삼론종(三論宗) 조사(祖師)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표정과 자태에 그대로 녹아난다.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지극한 경지에 오른 중국의 조상(造像) 수준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청동좌상의 분위기만으로 그가 번역한 '극락(極樂)' '열반(涅槃)'의 단어들이 연상되고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귓가에 메아리친다. 동아시아에서 친숙한 불교용어는 그의 업적이다.

구마라습의 청동좌상을 오른쪽으로 두고 절벽으로 향하면 벌집처럼 뚫린 무수한 굴이 있다. 가까이서 절벽의 재질을 느끼니 이곳을 '석굴'이라기보다는 '토굴'이라 부르는 것이 낫겠다. 신도들이 만졌던 자리가 움푹 패여 있을 만큼 모래가 뚝뚝 묻어나는 바위다.

여기서도 모가오굴처럼 안내원을 고용하고 허용된 몇 곳의 석굴만을 관찰해야 했는데 현재 남아있는 벽화는 많지 않다. 세월이 그 흔적을 지우기도 했고 이슬람화한 이후 현지인들이 의도적으로 훼손하기도 한 탓이다. 게다가 서양의 탐험가들도 뒤늦게 일조를 했는데 그 뜯겨진 흔적들 앞에선 예외 없이 안내원이 발걸음을 멈추고 지적한다.

이곳에 오면 반드시 참배하던 당대(唐代)의 8호굴에서 수미산을 형상화하기 위해 벽에 홈을 파고 나무를 꽂았던 흔적을 보았다. 둔황 모가오굴보다 200여년을 앞섰기에 남녀가 구분된 비천상이나 인도 영향을 받은 상반신 나체상 등을 보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내심 한 가지 생각에 다른 방들은 주마간산격이다.

a 한락연이 기거한 10호굴의 글. 원래 이곳은 선방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석굴 내는 촬영이 금지되어 화보를 재촬영한 것임

한락연이 기거한 10호굴의 글. 원래 이곳은 선방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석굴 내는 촬영이 금지되어 화보를 재촬영한 것임 ⓒ 오창학

드디어 조선족 화가 한락연(1898-1947)이 연구하며 기거하던 10호굴에 이르렀다. 벽에 남겨진 그의 글귀. 개인적으론 인도인의 모습으로 미륵보살상을 그려놓은 17호굴의 그림보다도 인상적이다. 1946년 벽화를 조사하고 모사하던 때 새긴 글로 제자의 원문은 이렇다.

"본인은 독일의 르콕이 지은 신장문화보고(寶庫)기와 영국의 스타인이 지은 서역고고를 읽고나서 신장이 고대 예술품을 대단히 많이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는 곧 신장에 올 생각이 났다. 1946년 6월 5일 단신으로 와서 벽화를 보니 실로 아름다운 옥이 눈앞에 가득한 것처럼 훌륭한 것이 너무 많았다. 모두 우리나라 여러 동굴들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고상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 벽면은 외국 고고대(考古隊)에 의해 벗겨졌는데, 문화사에서 일대 손실이다. 본인은 이곳에서 유화 몇 폭을 모사하려고 14일간 머물면서 준비를 충실히 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듬해 4월 19일 조우보우치(趙寶琦), 천탠, 판궈챵(樊國强), 쑨비둥(孫必棟)을 데리고 두 번째로 왔다.

우선 번호를 매겼는데, 정부(正附) 번호('韓氏編號'ㅡ필자)를 매긴 동은 모두 75좌다. 그러고 나서 개별적으로 모사·연구·기록·촬영·발굴을 진행하여 6월 19일 잠정적으로 한 단락을 지었다. 고대문화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참관하는 제위는 이곳을 특별히 애호하고 잘 보관해 주기를 삼가 바라는 바이다." - 정수일 교수 번역 인용


1947년 연구 결과물들과 함께 한락연을 태우고 이곳에서 란저우로 가던 군용기가 가욕관 부근 고비 사막에 추락했다. 비행기의 잔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a 한락연

한락연 ⓒ 오창학

"예술은 사람들에게 의식주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며 장사치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시정배 경향을 반대해야 한다"던 그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동과 소수민족을 소재로 한 일련의 풍속화를 보노라면 강요배의 그림들이 자꾸 겹쳐진다. 한락연의 그림 중 위구르인들의 경건한 종교의식을 반영한 <길가의 예배>, 혹은 <몽고족 노인> <광명을 향해 나아가는 티벳족> 등 어느 것 하나 눈에 띄는 요란함이나 기교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특히 소수민족에 대한 그의 끈끈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 출생 후 항일운동, 9년간의 프랑스 유학, 사회주의 운동, 화가와 고고학자로서의 활동으로 치열하게 살다간 겨레붙이의 흔적을 본다. 조선의 피였으나 중국인으로 살아야 했던 마음이 어떠했는지, 룽징에서 혼인한 부인 최신애와 딸 한인숙이 일본군 점령지에 있었던 탓에 중국여인과 다시 가정을 꾸려야 했던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속내까진 알 수 없으나 그가 보인 삶의 행적과 예술세계 앞에서 짠하고 숙연한 마음이 든다.

10호굴을 둘러보는 동안 조선족 가이드 철봉씨의 표정이 자못 비감하다. 이번 방문을 통해 처음 한락연을 알게 되었다는 철봉씨는 그에게서 어떤 동류감을 느꼈던 것일까.

10여 개 석굴을 둘러보고 입구로 나와 매점에서 컵라면과 과자로 주린 배를 채운다. 아직 바람이 불고 여운이 가시질 않는데 길을 재촉한다. 키질석굴을 나선 시각 오후 4시40분. 오늘은 카슈가르에 들어가야 하는데 오전에 수바스 고성을 찾아 헤매느라 허비한 3시간이 안타깝다.

오후 7시 20분. 홍기파 요금소를 지나는데 이 구간에 비가 내린다. 사막에서 맞는 비라 감회가 새롭다.

'카슈가르 가는 길'

오후 7시 40분. 금세 갠 하늘은 아직도 환하다. 아내에게 운전대를 넘겨받았다. 도로 갓길에서 승용차 운전자와 화물차 운전자가 싸우는데 무엇에 격분했던지 승용차 운전자가 자기 차로 달려가 운전석 아래를 뒤적인다. 이런 세상에! 한 뼘이 훨씬 넘는 칼을 집어들고 화물차 운전자에게 뛰어가는 것이 아니야. 놀란 화물차 운전자, 얼른 높은 화물차 운전석 위에 올라 몸을 숨긴다. 흠… 그래 어지간하면 양보하자.

a 쿠차에서 카슈가르 가는길. 밤 10시인데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는다

쿠차에서 카슈가르 가는길. 밤 10시인데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는다 ⓒ 오창학

오후 10시. 다시 말해 밤 10시인데 아직도 어둠이 내리지 않는다. 도로 상태도 그럭저럭 양호하다. 아직 갈 길이 먼데 이 추세면 오늘 안에, 늦어도 오늘을 넘긴 지 얼마 안 된 시간에 카슈가르에 도착할 것 같다. 2호차 일행은 우루무치 공항에서 카슈가르행 비행기를 탄다 하였으니 지금쯤 카슈가르를 향해 날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카슈가르에서 우루무치까지는 1990년대 초만 해도 보통 23일이 걸렸다. 그런 길을 비행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자동차로도 2~3일이면 닿을 수 있게 되었다. 도로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포장된 도로가 전 노선에 깔려있는 셈이다. 소수민족의 편리를 도모한 공사라기보다는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고 무엇보다 경제 기반 사업과 관련한 조처로 이루어진 혜택이다.

도로뿐 아니다. 서기동수(西氣東輸). 서부대개발의 대형 프로젝트로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서 간쑤성, 닝샤후이(寧夏回)족 자치구를 거쳐 상하이까지 4212km에 달하는 천연가스 수송 파이프를 까는 거대한 작업이 진행되어 2004년 8월 이후 타림분지의 5000억㎥의 천연가스를 중국 동부로 수송하고 있다.

이로써 30여 년간 중국은 천연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3000억 톤의 천연가스와 5억 톤의 석유가 신장에 매장되어 있으니 중국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모래사막뿐인 신장웨이얼 자치구를 잃을 수 없을 것이다.

10시가 넘어서면서부터는 급격히 어둠이 천지를 삼킨다. 아까부터 교수님이 운전 중이다. 키질 이래 아내, 나에 이어 교대한 것인데 하필 어둘 무렵 운전을 맡겨 송구스럽다. 이제껏 겪어온 일이지만 어둠이 앉은 사막의 도로는 참 어둡다. 가로등 없는 길이 어둡지 그럼 밝겠나? 그런 차원의 어둠이 아니다. 전조등으로 가를 수 없는 원초적인 어둠이다.

어둠이 부담스럽지만 마음이 급하니 자꾸 과속하게 된다. 평균 시속 120km. 사방이 어둠뿐이지만 그나마 사막으로 뚫린, 차량 소통이 거의 없는 길이기에 무리를 한다.

"아아악!"

모두가 보았다. 바로 눈앞에 들어온 돌의 장벽을. 누군가 차가 고장 나 돌로 위험 표지석들을 쳐놓고선 수리 후 그냥 떠나 버린 흔적이다. 도로 최대의 적이 이것들인데 상향등으로도 발견되지 않다가 목전에서야 보인 것이다.

후두두둑.

급히 속도를 줄였지만 그냥 치고 지나갔다. 바퀴 하나는 돌을 타고 넘고 하체 어딘가는 요란하게 부딪힌 것 같다. 앞부분 하체의 오일 쿨러 부분을 강판보호대로 쌌기에 망정이지 일이 나도 된통 날 뻔했다.

교수님께 교대하자는 말씀을 드려봤지만 계속 하겠다 하신다. 이 사건 이후 뒷좌석에 앉았으면서도 눈 한 번 돌리지 못한 채 전방을 주시한다. 손은 문쪽 손잡이를 꽉 쥐고 있다.

"아아악!"

차 안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은 거대한 화물트럭의 후면. 급하게 차가 선회했지만 백구의 오른쪽 옆 거울이 화물차에 부딪혔다. 거울 틀 자체는 남아있었지만 거울은 깨져서 덜렁거린다. 차를 세우지도 못 한 채 터질 듯 방망이질 하는 심장만 손으로 누르고 있다.

또 누군가가 고장 난 화물차를 길에 방치하고 자리를 비운 것이다. 아니면 안에서 자고 있던가. 전지가 나갔던지 비상등조차도 켜지 않은 채 그냥 주행차선 전체를 틀어막고 길에 방치해 놓은 차를 목전에 와서야 발견한 것이다. 먼 타향 객지에서 하마터면 불귀의 혼이 될 뻔한 사건을 겪고 모두 숙연해졌다.

카슈가르 진입을 앞두고 고속도로에서 버스의 대형사고를 수습하는 현장을 지나쳤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여행 내내 웅얼거렸던 주문을 왼다. '제발 무사히….'

a 카슈가르에서 2호차 일행 상봉. 며칠간의 헤어짐에도 이산가족의 해후만큼이나 반갑고 애절하다

카슈가르에서 2호차 일행 상봉. 며칠간의 헤어짐에도 이산가족의 해후만큼이나 반갑고 애절하다 ⓒ 오창학

새벽 1시. 카슈가르의 셔만 빈관에 도착했다. 비행기 편으로 카슈가르에 닿은 2호차 일행도 비슷한 시간에 숙소에 도착해 상봉했다. 겨우 며칠이건만 흡사 이산가족이 만난 듯 반갑고 애절하다.

2호차의 고장을 두고 여행에 실패란 있는가에 대해 토론도 하고 만두 20여 개를 놓고 늦도록 정담이 오갔다. 어렵사리, 힘들게 만난만큼 나눌 말이 많다. 덕분에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든다.

오늘 하루 845km를 주행했다. 참 멀고 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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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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