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경회루이정근
도당(都評議使司)의 뜻이었지만 정도전의 뜻이었다. 도당은 고려조에 연민의 정을 갖고 있는 수구세력과 혁명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한양천도 문제를 기화로 정도전이 평정한 셈이다. 재상정치를 꿈꾸는 정도전이 도당을 접수한 것이다.
한양천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와 좌복야(左僕射) 김주, 전 정당문학 이염, 중추원학사 이직을 판사(判事)로 임명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인왕산에서 돌아 온지 보름만이다.
이성계가 천도문제를 서두른 것은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개경인들의 시선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지만 핵심은 차기였다. 새로운 왕조가 태어나면 새로운 도읍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고려를 뒤엎어 서슬이 퍼런 자신도 신하들의 저항에 부딪혀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데 권위가 떨어진 세자 방석이 천도문제를 추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성질이 급한 이성계는 판문하부사 권중화, 판삼사사 정도전, 청성백 심덕부, 참찬문하부사 김주, 좌복야 남은, 중추원 학사 이직 등에게 한양을 답사하여 종묘사직과 궁궐, 시장, 도로의 터를 살펴 보고하라고 명했다.
권중화가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여 도면과 함께 바쳤다. ‘전조 숙왕(肅王) 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현 청와대자리)가 너무 좁아 그 남쪽에 해방(亥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壬座丙向)을 궁궐터로 정하였습니다. 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坎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여 임좌병향에 종묘의 터를 정하였습니다. 오늘말의 경복궁과 종묘 밑그림이다.
고려의 패망원인을 불교에서 찾은 정도전은 성리학적 입장에서 철저하게 척불숭유(斥佛崇儒)정책을 신도에 관철시켰다. 종묘사직(宗廟社稷)과 궁궐을 지은 다음에 손수 정전 이름을 지어 헌액 하였다.
성곽을 쌓고 4대문을 건립하면서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4대문 이름(興仁門, 敦義門, 崇禮門, 弘智門)에 원용하였고 보신각(普信閣)을 세웠으나 선바위는 성(城)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정도전의 배불정책은 철저하여 승려들의 도성 출입마저 금지시켰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