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을 약화 시키려는 명나라의 압박외교

[태종 이방원 59] 조선을 한반도에 묶어라

등록 2007.03.22 12:14수정 2007.03.2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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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을 접수한 정도전은 훨훨 날아가는데 혁명의 일등공신 이방원은 울분을 삭이며 추동에 칩거하고 있었다. 하륜이 전해준 '대학연의'를 읽어도 깨우침은 있었지만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지 않았다.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는 장인 민제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이지란과 작은 아버지 이화가 가끔 들러 위로의 말을 남겼다. 문전성시를 이루던 사랑방은 썰렁했다. 훗날 서로의 가슴에 칼을 겨누게 된 넷째 형 이방간이 박포를 데리고 찾아와 아버지와 정도전을 성토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위로는 위로이고 성토는 성토일 뿐 대책이 없었다. 선죽교의 거사를 주도했던 조영무는 끊임없이 추동을 맴돌았다.


사저에 칩거하며 울분을 삭이는 이방원

태조 이성계의 수결
태조 이성계의 수결이정근
해바라기는 해를 쫓는다던가? 추동 이방원의 사랑채 문지방을 번질나게 드나들던 발길들이 정도전의 사랑채로 향했다. 권력은 잡는 순간부터 부패한다던가? 권력을 쫓는 발길이 세자 전으로 쏠렸다. 쏠리면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세자 방석이 문제를 일으켰다.

"나의 거처가 낮고 좁으니 어찌 더위를 견딜 수 있느냐?"

방석의 말이었지만 현비 강씨의 뜻이었다. 도당에서 임금의 제가 없이 '세자전의 양청을 지으라' 는 명이 선공감에 내려왔다. 양청은 여름별장이다. 공사가 한 참 진행 중일 무렵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성계는 대노했다. 민심이 흉흉하고 임금인 자신도 양청이 없는데 세자가 무슨 양청이냐는 것이다. 즉시 공사가 중단되었고 선공감은 징계를 받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내사(내시)들이 세자를 감싸고 문제를 일으켰다. 말썽을 부린 세자빈 현빈 유씨를 내치고 내사 이만을 처형했다. 또한 탁발승들이 이성계의 수결이 있는 발원문을 들고 다니며 사대부들과 백성들을 현혹하여 거금을 갈취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반혁명세력 척결차원에서 왕씨를 탄압하여 씨(氏)를 말렸다. 저항하는 고려 유신들에게 강온양면작전을 구사했다. 조정의 문을 열어놓고 회유하여 조선에 참여한 선비도 있었으나 완강히 저항하며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선비도 많았다. 두문동 사건이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양천도 문제를 일단락 지은 이성계는 편할 날이 없었다. 명나라 문제가 가슴을 옥죄어 왔다. 흠치내사(황제의 명을 받든 조선인) 황영기가 조선의 국왕을 협박하는 조서를 가지고 온 이래 대명관계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입으로는 신하라 일컬으며 들어와 조공한다 하면서도 매양 말을 가져올 때마다 말 기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길들여 보게 하니 말은 모두 느리고 또한 모두 타서 피로한 것들이니 업신여기는 것이다. 또한 국호를 고치는 일을 그대가 원하는 대로 조선으로 허용하였는바 사자(使者)가 이미 돌아간 후에는 오래도록 소식이 없으니 업신여기는 것이다.”-<태조실록>

명나라의 트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부랴부랴 중추원학사 남재를 금릉에 파견하여 해명했으나 명나라는 강경했다. 1년 3사마저 거절하고 부르면 들어오라는 것이다.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은 새해가 되면 황제에게 하례를 올리는 하정사(賀正使). 황제의 생일을 경하하는 성절사(聖節使), 황태자의 생신을 축하하는 천추사(千秋使)가 관례였다.

급기야 성절사 김입겸이 요동에서 입국을 거절 당하는가 하면, 먼저 떠난 사은사 이염이 황제에게 매질 당하여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는 사태까지 발전하였다. 명나라는 조선 길들이기에 나섰고 조선은 전전긍긍했다. 역마를 내주지 않아 매 맞은 몸으로 요동에서부터 걸어온 이염의 모습은 약소국 외교사절의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몸을 낮췄다. 황태자를 잃고 손자를 황태손으로 책봉한 주원장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다. 중추원 학사 이직을 파견하여 예전대로 조공을 드리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는 표문을 올렸으나 거절당했다. 행패에 가까운 명나라의 태도는 저급한 트집인 것 같았지만 핵심은 정도전의 '요동정벌론'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정치적인 변혁을 겪고 있었다. 원나라를 북쪽 변방으로 몰아붙였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20년 이상 지속된 통일전쟁은 백성들로 하여금 전쟁피로에 젖게 했다. 황태자가 사망하고 황태손이 책봉되었지만 금릉이 요동쳤다. 연경(북경)에 야심만만한 주원장의 아들 연왕(훗날 영락제)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강하게 저항하는 원나라 잔존세력을 맞아 북방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데 조선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명나라는 허리를 찔리는 형국이었다. 원나라와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명나라는 원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요동을 일시적으로 내주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조선군은 격퇴할 수 있다고 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북방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명나라는 2개의 전선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한쪽 전선의 전황이 다른 쪽 전선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준비된 조선군이 요동을 점령했을 때 원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북방전선이 균열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전략가들이 피하고 싶은 그림이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 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이러한 국제정세 하에서 조선의 ‘요동정벌론’은 좋은 빌미가 되었다. 명나라는 차제에 조선을 한반도에 묶어 둘 필요가 있었다. 강력한 외교 공세로 부전이굴을 택한 것이다. 부전이굴(不戰而屈)은 손자(孫子)가 그의 병서 모공편(謀攻篇)에서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 시키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설파한 병법이다.

명나라 병부는 조선군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고려 말 최영군과 이성계군으로 양분되기 시작한 군(軍)은 조선개국과 함께 사병으로 분화되면서 조직적인 전투력은 떨어진 것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군의 기동력은 무섭게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군의 기병(騎兵)은 두려운 존재였다.

중국의 외교 공세는 명료했다. 말(馬) 1만 마리를 바칠 것. 명나라 해안에서 해적질을 한 자들을 잡아 압송할 것. 임무를 수행하러 들어오는 자는 조선의 실력자나 왕의 아들일 것. 등이었다. 해적은 덤으로 붙어온 것이고 핵심은 말과 실력자였다.

말은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전략물자다. 현대 전투력으로 말하면 전차나 장갑차 이상의 기동력의 상징이다. 숫자도 만만치 않다. 말 1만 마리를 현대전으로 해석하면 일시에 1만대의 장갑차를 빼내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나라의 요구는 조공도 아니고 상거래도 아닌 묘한 명분을 붙여 조선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다.

실력자는 '요동정벌론'의 진원지 정도전을 지칭하고 있다. 초강대국 미국이 어떤 나라를 들어 악의 축이라고 선언하듯이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미 정도전을 화(禍)의 근원이라고 규정해놓은 바 있다. 사신으로 아들을 요구한 것도 조선국왕 이성계를 심정적으로 묶어두려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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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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