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전 우물에서 녹슨 자아를 들여다 보다

[나만의 여행지]적오산성에서 나누는 돌과의 대화

등록 2007.03.29 16:11수정 2007.03.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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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3호 적오산성이 위치한 해발 250m 높이의 적오산. 산 모양이 정말 자라를 닮아 보이나요?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3호 적오산성이 위치한 해발 250m 높이의 적오산. 산 모양이 정말 자라를 닮아 보이나요? ⓒ 김유자

대덕밸리 I.C 맞바라기에는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 하나 있습니다. 산 모양이 마치 큰 자라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형태라서 붉을 적, 자라 오자를 써서 적오산이라 불렀다는 그 산자락엔 유성구 화암동 설목마을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산 정상에는 천년의 세월 동안이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백제시대 산성인 적오산성이 있습니다. 적오산성은 덕진산성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적오산의 북쪽 기슭 아래 인접해 있는 덕진동이 백제시대에는 소비포현, 통일신라시대에는 적오현, 고려시대에는 공주목 회덕군 덕진현으로 불렸기 때문입미다.


a 채석장 한 구석에 홀로 앉아있는 화암동 돌부처

채석장 한 구석에 홀로 앉아있는 화암동 돌부처 ⓒ 김유자

장승도 아니고 불상도 아니고

화암 사거리에서 우회전 대덕밸리 I.C 방향으로 조금만 더 가면 갤러리 준이라는 골동품 가게가 나옵니다. 그 옆으로 난 길로 산을 오릅니다. 일요일(25일)이라서 그런지 마을 주위엔 여기 저기 나물 캐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제가 적오산의 여러 등산로 가운데 이 길을 선호하는 것은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산 중턱에 옛날 채석장이었던 곳이 있는데 여기 설목마을 사람들이 돌부처라 부르는 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돌부처는 높이 1m 남짓으로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납작한 화강암에 손과 얼굴만을 특징적으로 새겼는데 위로 치켜 올려 뜬 눈이 꽤 인상적입니다. 이마에는 백호가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는 불상의 육계를 나타내려한 듯 둥근 선이 있습니다. 작자 나름대로는 불상처럼 새기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장승도 아니고 불상도 아닌 어정쩡한 작품이 되고만 게 아닌가 싶습니다.

a 군 초소 앞에서 바라본 옛 건물지. 헬기장 표시가 선명합니다.

군 초소 앞에서 바라본 옛 건물지. 헬기장 표시가 선명합니다. ⓒ 김유자

흉물이 돼버린 군 초소


채석장을 나와 왼쪽으로 난 산길을 올라갑니다. 적오산 등산로 가운데서 가장 가파른 길이 이 길입니다. 산자락엔 생강나무 노란꽃들과 붉은 진달래꽃이 한창입니다. 이곳은 대청호가에 있던 산성들보다 계절이 한참 빠른 듯 합니다.

산 8부 능선 쯤에 올라서면 화암 사거리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는데 여기서 몇 걸음만 더 가면 산성입니다. 성에 올라서면 제일 먼저 나그네를 맞이하는 건 헬기장이 된 건물지와 이제는 쓰지 않은 지 오래돼 흉물이 돼버린 옛 군 초소 건물입니다. 이 오랜 방치는 언제쯤이나 끝날는지요? 해골처럼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건물 하나가 한적하고 고즈넉한 이곳의 정취를 단박에 씁쓸한 맛으로 바꾸어버립니다.


a 말바위 감실 안에 새겨진 명문

말바위 감실 안에 새겨진 명문 ⓒ 김유자

방현마을의 봄을 노래한 시 한 수

초소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봉우리에 돌탑이 있습니다. 이곳이 해발 250m의 적오상 정상입니다. 이 돌탑 옆에는 말바위라고 하는 바위가 있습니다. 옛날 이 바위 위엔 무쇠로 만들어진 말이 얹혀져 있었다고 합니다. 전설은 이 말머리가 평소 어느 쪽을 향하고 있었는지 일러주지 않고 있는데 하여간 덕진마을 쪽으로 돌려 놓기만 하면 호랑이가 덕진마을에 내려와서 개를 물어 갔다고 합니다.

제 나름대로 이 전설을 유추해 보면 옛 덕진마을 사람들이 일찍부터 이 산을 신성시하고 이 바위를 터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설화 속에서나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은, 중요 인물의 탄생을 알리고 알아 볼 줄 아는 영물이나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구실을 하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나옵니다. 그런 바위를 손대면 재앙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무튼 지금은 무쇠로 만들었던 말은 없어졌고 말이 놓였던 바위만 남아 있어 말 바위라 부른다는군요. 말바위엔 바위를 파서 만든 감실이 있습니다. 거기엔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최근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시 한 수가 새겨져 있습니다.

赤鰲隨溪 (적오수계) 적오산 계곡을 따라
芳里春風(방리춘풍) 방현마을에 봄바람이 불어오네
靑柳連城 (청류연성) 푸른 버드나무는 성을 따라 줄지어 섰는데
係馬於枝(계마어지) 말은 나무가지에 매어있구나


방현마을은 이 산의 서쪽에 잇대 있는 마을입니다. 사언 절구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시 형식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한가하고 평화로운 봄의 정취를 노래한 시의 내용만은 나무랄 데 없어 보입니다. 산 꼭데기에서 내려와 북쪽으로 뻗은 길을 바람만 바람만 따라 갑니다.

a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견뎌낸 동북벽 일부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견뎌낸 동북벽 일부 ⓒ 김유자


a 아래서 올려다 본 동북벽. 꽤나 웅장한 성벽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아래서 올려다 본 동북벽. 꽤나 웅장한 성벽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 김유자


a 허물어진 동북벽의 성돌들. 연륜이 쌓인 돌의 무게란 이런 걸까요?

허물어진 동북벽의 성돌들. 연륜이 쌓인 돌의 무게란 이런 걸까요? ⓒ 김유자

빛깔 그대로 푸른 역사가 돼버린 성돌

말바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동북벽에 닿습니다. 이곳엔 옛 성벽 20~30m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조심 조심 성벽 아래로 내려가서 쳐다봅니다. 처음 이곳에 섰을 때 저는 아주 커다란 감동을 받았답니다. 세월의 깊이를 말해주는 듯한 이끼낀 성돌 앞에서 가슴이 그만 뭉클해지더군요.

성벽은 자연석을 가로 쌓았는데 높이는 대략 6m∼7m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위로 올라 갈수록 조금씩 뒤로 물려가면서 바깥면을 맞추어 자연스럽게 쌓았습니다. 이곳의 성벽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성은 대체로 안팎을 돌로 쌓는 협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번엔 고개를 아래로 돌려서 허물어진 성돌들을 바라봅니다. 파랗게 이끼낀 돌들이 이쁩니다. 역사를 가리켜 청사라고 하지요. 이끼낀 돌들이 간직한 역사는 그 빛깔 그대로 청사인 듯 합니다.

여기서 산 아래를 굽어보면 한국원자력연구소, 원자력환경관리센터, 한국원전연료주식회사 등 대규모 원자력단지가 보입니다. 저곳이 바로 예전에 덕진마을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어쩌면 말 바위의 전설이 가장 확실한 형태로 실현된 건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원자력단지인 호랑이가 마을을 통째로 물어간 셈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a 서문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성안의 우물(2007.1). 눈에 쌓인 우물과 물이 더욱 정갈해 보입니다

서문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성안의 우물(2007.1). 눈에 쌓인 우물과 물이 더욱 정갈해 보입니다 ⓒ 김유자


a 봄은 돌마저 화사하게 만드나요? 겨울과는 또 다른 우물의 풍경(3.25)

봄은 돌마저 화사하게 만드나요? 겨울과는 또 다른 우물의 풍경(3.25) ⓒ 김유자

우물에서 나를 들여다 보다

성벽을 바라보며 한없이 머물고 싶은 생각을 지그시 누르며 길 위로 올라와서 북쪽 끝에 있는 북문지로 향합니다. 북문지에서 쭉 가면 금병산에 이르게 됩니다. 북문지 밖에서 북문지를 들여다 보다 다시 안쪽으로 들어와서 서문지로 가는 희미한 길을 내려갑니다.

서문터에서 약 30m 떨어진 곳에는 돌로 만든 우물이 있습니다. 성의 입지를 결정하는데 물의 존재가 작용했다면 이 우물은 아마 처음 성을 쌓았던 백제시대부터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 성에서 백제시대 후기에서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성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동안엔 이 우물도 쓰임새를 잃지 않았을 테지요. 우물은 아주 깨끗해서 최근까지도 누군가가 사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중간에 언제, 몇 번이나 개축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도 이 우물의 석축은 견고하고 물도 마실 수 있을 만큼 깨끗해 보입니다. 올 1월 눈보라가 희끗희끗 날리던 날 아침에 이곳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발자국 소리가 낸 인기척에 놀란 어린 고라니 두 마리가 후다닥 뛰쳐나와 북쪽으로 도망가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후 저는 이 샘을 고라니 사촌인 '노루샘' 이라고 부르기로 했답니다.

눈이 쌓였을 때 이곳에 와서 우물을 오래 들여다 보면 알싸하게 아픈 마음이 스쳐갑니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이라는 시가 생각나서일까요? 시의 마지막 연을 가만히 읊어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길거나 짧거나, 멀리 가거나 가까이 가거나 모든 여행은 끝에 이르게 되면 자신의 자화상을 점검하게 마련입니다. 마냥 즐기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여행은 반성하고 싶은 자가 떠나게 되고 그 사람은 반성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에 묻은 티끌을 씻어내고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

적오산성의 우물은 나를 들여다 보게도 하지만 우리 역사를 들여다 보게도 합니다. 문득 개인의 역사거나 민족의 역사거나 맘껏 도취할 만한 나르시시즘을 갖지 못한 역사는 슬픈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문지 근처에는 꽤 너른 건물지가 있습니다. 그 건물지에서 보면 산성 내의 지형이 동쪽은 높고 서쪽이 낮은 동고서저의 형상이라는 게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냥 높은 게 아니라 동쪽은 거의 절벽처럼 보입니다. 서문 터에 서서 서북쪽을 바라보니 우산봉과 갑하봉이 바라다 보입니다. 먼 산이 가깝게 느껴질 때는 봄이 온 것이라는데 꼭 오늘이 그렇습니다.

a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는 북벽의 일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는 북벽의 일부 ⓒ 김유자

역사의 은유를 읽어내고 싶어

다시 북문터께로 올라온 다음 길을 따라서 다시 성의 첫머리로 옵니다. 초소 옆에 서서 바라보면 동남쪽으로 계족산성 및 우술성이 보이지요. 그리고 아까 서문지에서 바라보았던 우산봉 바로 옆에는 안산동산성이 있답니다.

어느 시인은 "바람부는 날엔 압구정에 가야한다"고 거스를 수 없는 소비의 욕망을 이야기했지만 저는 바람이 불어도 여기 오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여기 옵니다. 여기 와서 천년 동안이나 마르지 않은 우물을 보며 결코 마를 수 없는 역사에 대한 은유를 읽어냅니다.

이끼낀 성벽 돌틈에서 가공하지 않은 역사의 진실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복원'하지 않은 성벽의 아름다움과 세월과 더불어 풍찬노숙한 돌만이 가진 아름다움을 느끼다 갑니다. 계족산성이나 보은의 삼년산성 등 이른바 '복원'한 성벽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역사의 은유와 감동이지요.

그 감동이 천년의 세월 저편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니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제 가슴 밑바닥에 천년의 세월을 내장하고 있는 유전자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주미술관 쪽으로 길을 잡아서 서서히 산을 내려 옵니다. 무슨 특별한 전시회라도 있는지 아주미술관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그러나 산 위에서 옛 사람과 천년의 비바람이 합작한 아름다운 조형물을 관람하다 내려온 저는 아주미술관을 그저 스치듯 지나쳐 집을 향한 발길을 서두릅니다.

덧붙이는 글 | ☞가는길
①대덕밸리 I,C 에서 좌회전 →한국 원자력연구원 앞→아주미술관 주차
②화암 네거리 굴다리 왼쪽 등산로를 택하거나 대덕밸리 I,C 쪽으로 더 오셔서 갤러리 준 옆길로 오르면 됩니다. 

25일(일요일)에 다녀왔습니다.    '<나만의 여행지> 응모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가는길
①대덕밸리 I,C 에서 좌회전 →한국 원자력연구원 앞→아주미술관 주차
②화암 네거리 굴다리 왼쪽 등산로를 택하거나 대덕밸리 I,C 쪽으로 더 오셔서 갤러리 준 옆길로 오르면 됩니다. 

25일(일요일)에 다녀왔습니다.    '<나만의 여행지>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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