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진아 수업이 아니라 특별보충수업이야"

학교에는 '부진아'도 '부진아 수업'도 없다.

등록 2007.04.02 10:19수정 2007.04.02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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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마지막 수업시간이었다.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일일이 눈을 맞추며 출석을 부르는데 한 아이의 표정이 시무룩해 보였다. 이름을 부르면 나와 눈을 맞추며 영어문장을 하나씩 말해야 하는데, 아이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Yes, sir"라고만 짧게 대답을 할뿐이었다.

평소 같으면 샛별 같은 눈을 반짝이며 "I love you!"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을 아이가 시무룩하다 못해 슬픈 표정을 짓고 앉아 있으니 참 딱한 노릇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Are you sick?(어디 아프니?)"

아이는 영어를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못 알아들었는지 그 말에 대꾸할 생각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더니 불쑥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선생님, 부진아 수업 꼭 받아야 해요?"
"당연히 받아야지. 그런데 그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거야?"
"창피하잖아요."
"뭐가 창피해. 너희들 영어 실력이 다 거기서 거긴데 뭐. 그리고 이번 기회에 열심히 기초를 다지면 다른 친구들보다 더 실력이 나아질 수도 있어."

아이는 내 말에 수긍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잠깐 말이 없더니 또 내게 이렇게 물었다.

"남학생들하고 같이 받아요?"
"그렇겠지. 반이 하나뿐이니까."
"그럼 저 받을래요."
"뭐? 아까는 창피하다더니 남학생하고 받는다고 하니까 받겠다고?"


나는 아이의 말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다 녀석의 표정이 더욱 나를 아리송하게 만들었다. 시무룩했던 표정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아이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마저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남학생들하고 공부하면 더 창피하지 않아?"
"누가 공부 못하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한다고 했어요?"
"그럼?"
"부진아라는 말이 창피하잖아요."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그들의 생각이 나와 비슷하려니 지레 짐작했다가 그것이 아닌 것을 알고 당황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경우, 처음에는 아이들의 생각이 짧거나 좀 엉뚱하다는 쪽으로 정리가 되다가, 차츰 내가 미처 아이들의 심리나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결론이 날 때가 많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창피하지 않지만 부진아라는 말은 창피하다? 얼른 들으면 아이의 모순적인 행동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곧 부진아가 아닌가. 그런데 아이는 공부를 못한다는 본질보다는 그것을 지칭하는 언어(현상)에 더 마음을 쓰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남학생들하고 같이 공부한다니 금세 화색이 돌다니?

하지만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다. 세상에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있고 못하는 아이도 있다.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오로지 성적으로만 한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나라에서는 학생의 절반 이상이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다 창피한 아이들인가. 그들 스스로도 공부를 못하는 것을 창피하게 여겨야 하는가?

아이는 공부를 못하는 것은 창피하지 않다고 했다. 따라서 남학생들하고 같이 특별보충 수업을 받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기는커녕 금세 화색이 돌 정도로 좋아했다. 그것은 아이가 건강하다는 징조일 수도 있다. 비록 공부를 못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전체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함도 그렇거니와, 한참 호기심이 많은 사춘기 소녀가 남학생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그러하다.

아이는 부진아라는 말이 창피하다고 했다. 사실 학교에 '부진아 수업'은 없다. 기초가 부족한 아이들을 위한 특별보충수업이 있을 뿐이다. 영어나 수학 기초가 다소 부족한 아이들을 일컬어 부진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언어폭력일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부진아 수업이 아니야. 그런 말은 없어. 영어특별 보충수업이야. 너희들을 특별히 학교에서 신경을 쓰고 공부를 시키려는 거야. 기초가 부족한 상태로 그대로 방치하면 계속해서 실력이 떨어지니까 기초를 잡아주려는 거지. 그래서 돈도 국가에서 내는 거야. 너희들 잘못이 아니니까. 참 이번 영어 특별반 보충수업은 내가 맡을 거야. 영어 기초도 잡아주지만 너희들이 좋아하는 팝송도 배울 거야."

그때였다. 창가에 앉은 한 아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큰 소리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선생님, 저도 부진아 수업 받으면 안 돼요?"

가만 보니 손을 든 아이가 그 아이뿐이 아니었다. 그 애 말고도 너덧 명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대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였다. 나는 잠깐 교실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했다.

"허허, 부진아 수업이 아니라 특별보충수업이래도 그러네. 그리고 너희들은 미안하지만 자격미달이야. 다음 기회에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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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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