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님의 그곳을 갖고 놀던 전근대 프랑스 사람들

전근대 사회에서 아동에 대한 특별 보호가 없었다

등록 2007.04.02 12:11수정 2007.04.02 12:11
0
원고료로 응원
현대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아동을 성인의 성(性)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성인들은 남자 어린아이의 민감한 부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곤 했다. "미국에서는 이렇게 하면 감옥간다"고 하면서도 한국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런 '범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에서 아동의 성은 매우 특별한 법적 보호를 받고 있다. 예전 같으면 무심코 행해졌을 일들이 요즘에는 사법적 판단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동에 대한 사회적 보호, 아니 사회적 격리는 비단 성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도덕적 영역에서도 강도 높게 이루어지고 있다. 부모나 교사 자신은 밖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관계없이, 아이나 학생에게만큼은 높은 수준의 도덕적 삶을 강요하고 있다. 적어도 어린아이들의 세계에서는, 남을 먼저 배려하고 인간에게 진실을 다하는 사람만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은 다분히 '현대적'인 것이다. 시간을 좀 더 소급시킨다 해도, 그것은 적어도 근대 이후의 일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아동을 성인으로부터 보호 혹은 격리한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어린이 앞에서 성적 농담을 삼가고 도덕적 이야기만 하는 풍경은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다시 말하면, 전근대 사회에서는 아동의 특수성을 배려하는 사회적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일례를,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3세(1601∼1643년)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루이 13세는 프랑스 절대주의의 기초를 닦은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일요일의 역사가'로 잘 알려진 필립 아리에스(1914∼1984년)가 지은 <아동의 탄생>(새물결 출판사, 2003년)에서, 프랑스 귀족 혹은 궁인(宮人)들이 어린 왕세자에 대해 행한 '불경한' 행동들을 통해 아동에 대한 전근대적 관념의 일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필립 아리에스가 일요일의 역사가로 불리는 것은 그가 석사학위도 없는 재야 사학자이기 때문이다.

"왕세자님은 고추가 없네요?" 세 살짜리 어린 루이 13세에게 귀족 부인들이나 하녀들이 곧잘 하던 농담이었다. 그러면 루이 13세는 자신의 그곳을 직접 보여주면서 주변 사람들의 놀림에 대해 '반증'을 제시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세자가 누이인 공주와 함께 침대에서 벌거벗은 채로 키스하고 속삭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또 아버지인 앙리 4세 역시 "아들아, 스페인 공주와 결혼하는 데에 쓰는 '물건'이 어디 있지?"라는 농담을 자주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궁인들이 왕세자의 그곳을 만지면서 갖고 노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우리가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면, 아마 백이면 백 다 "이런 콩가루 집안이 또 있나?"라며 혀를 찼을 것이다. TV 드라마에서 어린 왕세자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다하는 상궁이나 내관의 모습을 지켜본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현대적 관점에서 제작된 사극에 익숙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화적 충격인지도 모른다.


더 놀라운 것은, 위와 같은 일들이 프랑스 퐁텐블로 궁전뿐만 아니라 유럽 평민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다는 점이다. 전체 유럽의 광경을 보노라면, 우리는 "이런 콩가루 시대가 있었나?"라며 경악해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풍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7세기 초반 이전의 유럽 사회에서는 아직 어린이의 성에 대한 특별한 의식이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사회는, 어린아이도 성욕을 느낄 수 있으며 어린이가 어른의 성에 노출되면 정상적인 성장에 방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무지하였던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아동에 대한 특별 보호가 없었다는 것은, 당시의 아동들이 생후 몇 년 후부터는 성인 세계에 무차별적으로 뒤섞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치 부모 없는 아이가 먹고살기 위하여 성인들의 직업세계에 뛰어드는 것처럼, 전근대 사회의 어린이들은 그렇게 어른들의 세계에 뒤섞였던 것이다.

이 점은 당시의 회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오스트리아 클로스터노아부르크 대성당에 있는 1181년 제작한 <홍해를 건넘>이라는 그림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묘사되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a 필립 아리에스가 지은 책 <아동의 탄생>에 실린 <홍해를 건넘>

필립 아리에스가 지은 책 <아동의 탄생>에 실린 <홍해를 건넘> ⓒ 새물결 출판사

그림에 나타난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순간 징그럽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린아이가 몸만 어린 아이일 뿐,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얼굴은 옆에 있는 노인의 얼굴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아동을 그저 '작은 성인'으로만 인식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성인과 다른 대상으로 인식한 게 아니라, 성인들 속에 섞여 있는 '작은 성인'으로만 인식한 것이다. 아동을 각별한 보호의 대상으로 끔찍이 생각하는 현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후대에 와서 아동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그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세기 중반인 1650년에 제작된 그림에서는 전혀 다른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성가족>이라는 그림을 감상해 보자.

a 필립 아리에스가 지은 책 <아동의 탄생>에 실린 <성가족>

필립 아리에스가 지은 책 <아동의 탄생>에 실린 <성가족> ⓒ 새물결 출판사

<성가족>의 아이는 <홍해를 건넘>의 아이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성가족>의 아이는 진짜로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것은 17세기 이후의 사회가 아동을 거룩하게 여기고 또 이들에 대해 특별 보호(정확히 말하면 격리 조치)를 취한 것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기본적으로 현대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점을 본다면, 아동이 특별대우를 받은 일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현상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동에 대한 특별보호는 근대 이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17세기 이후에 아동이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필립 아리에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17세기 이후 기독교적 도덕주의가 사회적 지지 혹은 공감대를 얻으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어린이를 비기독교적 부도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도덕주의자들(특히 예수회 수도사, 얀센주의자, 오라토리오회 수도사)의 노력이 낳은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17세기 이후의 유럽에서는 이전과 달리 어린이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 교육을 시행하고 이들을 어른의 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어린이에 대한 존칭의 사용도 이 시기부터 두드러진 것이었다고 한다. "친애하는 어린이 여러분"과 같은 표현은 17세기 이후 유럽의 예법서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성인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근대적 산물이다.

관심을 둘 만한 부분은, 이러한 경향이 17세기 이후에 '아기 예수'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17세기 이후의 종교적인 회화나 판화 등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거룩한 아기 예수였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에서 아이의 거룩함을 특히 강조하는 것은 17세기 이후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마태복음 18장 3절의 말처럼, 근대 이후의 기독교 교회에서는 어린아이의 신성성이 특히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세속적인 세계에서도 어린아이는 거울처럼 깨끗한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17세기 이후의 새로운 경향에 따라, 현대 세계는 아동을 성인세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의식적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TV나 인터넷으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어린이를 건전하고 착한 사회인으로 양육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점은 모든 어른들이 공감하는 바이고, 그러한 공감대를 전제로 하여 아동교육 혹은 자녀교육에 막대한 사회적·개인적 재원이 투입되고 있다.

그런데 근대 이후의 세계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아동을 성인세계로부터 보호하려는 노력은 매우 바람직하고 또 앞으로도 계속 권장되어야 할 사항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아동을 보호하는 데에만 치중할 뿐, 아동을 어떻게 성인세계에 편입시키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듯하다.

'아동의 아동화'에만 관심을 둘 뿐 '아동의 성인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은 매우 크다. 아동 시절에 배운 높은 수준의 도덕률이 성인세계의 문턱에 들어서는 순간 무용지물이 될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성인기에 접어든 사람의 가치관 자체를 뒤흔들고 사회에 대한 실망마저 낳고 있다는 점이다.

아동 시절에는 아이에게 도덕률을 권장하던 부모도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거나 혹은 사회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부터는 자녀에게 전혀 다른 도덕률을 은근히 가르치기 시작한다. 과거에 내가 언제 그렇게 가르쳤다는 듯이 말이다.

아동 시절의 자녀에게는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고 인간에게 진실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부모도 막상 자기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그렇게 살면, 은근히 자녀의 미래가 걱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우회적으로 자신의 옛 가르침을 수정하기도 한다.

이 점은 현대 사회가 아동의 아동화에만 관심을 둘 뿐 아동의 성인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아동을 거룩한 성인으로 유지시키는 데에는 무력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현대 사회의 무능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현대 사회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7세기의 지식인들은 현대 세계에 중요한 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아동을 아동으로 인식하고 보호하는 데에 필요한 지적 토대를 남겼다는 점이다.

이제 21세기의 현대인들은 미래 세계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유산을 남겨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아동을 거룩한 성인으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어릴 때에 배운 도덕률을 죽을 때까지 실천하더라도 결코 사회에서 낙오되는 일이 없도록, 새로운 사회적 관념과 제도를 만드는 데에 참여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숙제일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