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의 최영길 소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호주는 불과 4일 뒤인 6월 29일에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한반도에 파병을 결정한다. 미국의 참전을 돕기 위해 호주해군 소속 바탄호 등을 UN군 휘하에 배속시켰던 것.
또한 하루 뒤에는 호주공군 77비행중대 소속 무스탕전투기를 한국전에 투입했다. 바로 그 비행기가 세계 전쟁사에서 최초로 사용된 제트전투기로 한국인들은 그후 오랫동안 이 비행기를 '호주끼'라고 불렀다.
이어서 9월 28일에 호주육군 제3대대가 부산항에 당도하게 되는데, 마침내 호주의 육해공군이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순간이었다. 제3대대는 UN군의 북진에 가담해 압록강을 목전에 둔 평북 박천까지 진격했다. 바로 그 기간에 16살의 최영길 소년이 운명적으로 제3대대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그 해 11월 1일,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면서 초대 3대대장이었던 찰리 그린 중령이 30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한국인이 있었는데, 바로 그 사람이 '한국인 호주 공식이민 1호'가 된 최영길씨였다.
그러던 51년 4월 23일, 호주육군 제3대대는 '가평대대'로 거듭 태어나는 중요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경기도 가평지역에서 중공군의 춘계대공세를 죽음으로 막아냈던 것.
그 전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속수무책으로 후퇴하던 UN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재반격할 수 있도록 만든 전투여서, 나중에 '가평전투'라는 별칭으로 한국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제3대대는 가평전투를 통해 피아간 중요한 요충이었던 경춘가도를 차단하려는 중공군의 기도를 좌절시킴으로써 불리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 공로로 트루만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았고, 그후 부대이름을 아예 '가평대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가평대대는 휴전협정으로 한국전쟁이 끝나서 호주로 돌아올 때, 가평지역에서 바위와 나무, 38선 콘크리트 모형 등을 가져와 제3대대 대대본부 앞에 설치해 놓아 대대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