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완료? 착각에서 빠져 나오라

[상상변주곡 ①] 도정일 교수 "경제적 가치의 유일가치화가 문제"

등록 2007.04.27 10:29수정 2007.05.08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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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학평론가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 이정환




"세계 어디에도 20년 만에 민주주의를 성취한 나라는 없다. 민주주의는 완성과 종료의 지점이 없는 '긴 과정'이다. 그런데도 상당수 한국인들이 '이제 민주주의는 되었다'라는 가당찮은 착각에 빠져 있다. 이런 어법과 태도는 극히 위험한 착각과 터무니없는 자만에서 나온다."

이제 그만 착각에서 깨어나라! 문학평론가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의 '신호'와 함께 6월민주항쟁 20년 기념 대토론회 '민주화 20년, 문화 20년. 상상변주곡'의 막이 올랐다.

26일 서울 배재정동빌딩 B동 1층에서 열린 '상상변주곡' 1차 토론회에서 도정일 교수는 "경제적 가치만이 유일한 가치인 것처럼 여기는 현상이 극에 달했다"면서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질문,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이며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를 되살려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도 교수는 '민주화 20년, 문화 20년 - 몇 가지 성찰과 비판'이란 제목의 주제 발표를 통해 먼저 "1987년은 현대 한국이 국가 수립 이후 사실상 처음이라 할 '시민의 탄생'을 목격하고 기록한 해"라며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탄생한 국민이 1987년에 와서야 근대적 민주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고 6월 항쟁의 의미를 규정했다.

하지만 도 교수는 우리 사회가 첫 걸음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마라톤에는 종착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향한 법률과 제도를 정비한 성과만으로 '이제는 다 되었다'는 식의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의 근본 원인으로 도 교수는 '취약한 민주주의 문화'를 꼽았다. 그는 "'문화'라는 이름의 어떤 한정된 영역이나 예술 활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시민의 가치관, 태도, 행동방식을 안내하는 화살표이자 규범"을 민주주의 문화라 정의하고 "이런 토양이 일궈지지 않은 곳에서 민주주의의 지탱과 발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a 주제 발표문에 일일이 줄을 치며 꼼꼼히 살펴보는 방청객이 눈에 뜨일 정도로 토론회 열기는 뜨거웠다. 이날 진행을 맡은 문화단체 풀로엮은집 정윤수 사무국장

주제 발표문에 일일이 줄을 치며 꼼꼼히 살펴보는 방청객이 눈에 뜨일 정도로 토론회 열기는 뜨거웠다. 이날 진행을 맡은 문화단체 풀로엮은집 정윤수 사무국장 ⓒ 이정환

이어 도 교수는 민주주의 문화 '불모증'의 책임이 이른바 '문민정부·국민의 정부·참여정부'와 시민 사회 모두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주의 문화 성숙에 필요한 문화 정책들을 세우고자 노력한 정권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는 문민정부 3대를 거치는 동안 정책적 노력, 장기 비전과 계획, 시민교육투자 등이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으로 드러난다"며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의 집단이 바로 문화관광부가 아니냐"고 맹공을 펼쳤다.

도 교수의 비판은 시민사회 중에서도 특히 '교육계'와 '언론계'로 이어졌다. 도 교수는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발전시켜야 할 시민교육이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대학은 기업에 당장 필요한 인재를 길러 내보내는 곳이 됐다.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교육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도 교수의 '부끄러움'은 언론 문제에 이르러 "대한민국에 언론다운 언론이 있냐"는 말과 함께 맹렬한 '가락'으로 바뀌었다. 그는 "1987년 항쟁으로 신장된 자유를 언론 매체들이 어떻게 이용했느냐. 자기 조직의 이익을 공익보다 앞세우는 '자유의 타락'이 나타났다"면서 "민주주의에 자신들을 봉헌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언론 조직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결과 도 교수는 '공포의 문화'와 '지향 상실'이란 엉뚱한 문화가 우리 사회에 자라났다고 진단했다. "IMF 위기와 시장 세계화의 진행에 따른 직업 안정성의 심각한 동요 그리고 빈부 양극화 심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인은 자기 삶의 안정, 가족의 안녕, 소속 집단의 미래 등 위기를 경험했고, 그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일이 다른 모든 관심을 압도하는 제 1의 관심사"가 되면서 공포의 문화가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이어 도 교수는 공포의 문화가 사회 전반에 급속히 퍼지면서 "사회 구성원들을 결속시킬 공유의 가치, 집단적 목표, 사회적 지향의 상실 등 공동의 가치가 휘발해버리는가 하면, 동시에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이며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등의 핵심 질문까지도 잊혀지는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도 교수는 '마지막 성찰'을 뼈아픈 자성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사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경제적 가치'란 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 가치만을 유일한 가치로 여기는 분위기가 사회를 장악했다"면서 "각자 자기 삶의 의미를 자기 방식으로 조직해야 하는 시민들이 '유일가치화'에 합세하고 마치 어쩔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엎드린 것은 심하게 표현하면 목불인견의 참상"으로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것은 경제적 가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유일가치화'"라고 정리했다.

도정일 교수의 주제 발표에 이어 홍기돈 문학평론가와 교양잡지 <고래가 그랬어> 김규항 발행인의 토론이 이어졌다.

먼저 홍기돈 문학평론가는 거대 담론의 실종을 문제로 제기했다. 그는 "과거 거대담론, 사회 얼개에 집착하는 것 때문에 문화, 일상, 우리 삶과 관련된 섬세한 부분들이 함부로 취급된 것에 대한 반성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라며 "하지만 지금은 얼개를 바라보는 능력이 사라졌고, 얼개 이야기에 대한 거부감이 불필요하게 많아졌다"고 주장했다.

김규항 발행인은 도 교수의 '공동 가치 회복 주장'에 대해 보다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흔히 '개혁이 변질됐다'거나 '노무현의 개혁 의지가 변했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보지 않는다"면서 "개혁과 진보가 상당히 다르다. 사회 근본적인 변화를 시키는 것이 진보라고 한다면, 개혁이라는 것은 근본적인 진보를 막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발행인은 "유럽 사민주의 국가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신자유주의 흐름인데, '어떻게 거부하느냐, 말도 안 된다'는 일종의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주장이 있다"며 "하지만 마치 전적인 추종이나 전적인 거부, 둘 중 하나만 있는 것 같은 기만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얼마든지 섬세한 차이가 존재하는데도 국익이란 이름으로 국가 단위 선택이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민주항쟁20년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화단체 풀로엮은집이 기획을 맡았으며, 약 70여명의 방청객이 토론장을 가득 채운 가운데 시종 일관 열띤 분위기 속에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낯익은 회고보다 격렬한 소통을!
1차 '상상변주' 성공적으로 끝나

ⓒ이정환

'낯익은 회고담보다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격렬하고도 진지한 소통'을 내건 '상상변주'의 출발은 성공적이었다.

70여석 자리가 꽉 찼고, '연주'를 지켜보는 방청객들의 집중도는 매우 높았다. 쉬는 시간도 없이 2시간 30분 동안 토론이 진행됐지만, 좀처럼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진 촬영으로 인한 '방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진지한 분위기였다.

물론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홍기표씨(35세)는 "다소 원론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뤄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토론 과정을 통해 재확인하는 정도에 머물러 아쉬웠다"면서 "다음 토론부터는 좀 더 정밀하고 세밀해진다고 하니까 기대를 갖고 지켜 보겠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용상씨(30세)는 "6월 항쟁 20년이 기념으로 머물 일인가는 생각에 불편한 마음을 갖고 왔지만, 논의가 많이 진전됐음을 느꼈다. 의미 있는 자리였다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상상변주'를 조율한 '풀로엮은집' 정윤수 사무국장은 "자꾸 시계를 쳐다보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로 진지한 분위기였다"며 "수 년 동안 이런 이야기를 나눌 자리가 없었던 것 같다. 이제 시사적인 갑론을박에 머물기보다 좀 더 거시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6월민주항쟁20년기념 대토론회 '상상변주곡'은 6월 7일까지 총 8회에 걸쳐 개최되며, 2차 토론회는 오는 5월 3일(목) 문화평론가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우리에게 우리는 무엇인가'란 제목의 주제 발표를 할 예정이다. 참가비는 무료다.

다음은 상상변주곡 일정이다.

(1회) 민주화 20년, 문화 20년을 되돌아본다. 4월 26일(목) 저녁 7시
주제 발표 : 도정일(영문학자, 경희대 명예교수), 토론 : 김규항(사상가), 홍기돈(문학평론가)

(2회) 우리에게 '우리'는 무엇인가. 5월 3일(목) 저녁 7시
주제 발표 : 진중권(문화평론가, 중앙대 겸임교수), 토론 : 정준영 외

(3회) 진보문화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선. 5월 10일(목) 저녁 7시
주제 발표 : 복거일(소설가, 미래문화포럼 대표), 토론 : 이명원(문학평론가) 외

(4회) 6월 민주항쟁 이후 한국인의 내면 풍경. 5월 14일(월) 저녁 7시
주제 발표 : 임상수(영화 감독), 토론 : 강유정(영화평론가) 외

(5회) 지난 20년의 '소설'을 다시 읽는다. 5월 17일(목) 저녁 7시
주제 발표 : 심진경(문학평론가), 토론 : 고명철(문학평론가), 이기호(소설가)

(6회) 진보 운동과 민족문화 운동의 새로운 모색. 5월 23일(수) 저녁 7시
주제 발표 : 김명인(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토론 : 이동연(사회학자), 방현석(소설가)

(7회) 세계화 시대에 구상하는 진보 운동의 문화 전략. 5월 31일(목) 저녁 7시
주제 발표 : 조정환(문학평론가), 토론 : 정희진(여성학자), 신윤동욱(한겨레21 기자)

(8회) 민주화 20년, 철학적 사유의 변화와 모색. 6월 7일(목) 저녁 7시
주제 발표 : 이진경(철학자, 서울산업대 교수), 토론 : 미정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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