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딸에게 먹인 '눈물의 라면'
다음 달 가스요금은 어쩌지요?

아무리 일해도 '경제성장'은 남의 나라... 우리집엔 새벽이 언제 오나요

등록 2007.05.04 14:28수정 2007.05.0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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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사람들도 팍팍하게 살아가고 있어 위안 아닌 위안을 삼곤 합니다. 사진은 지난 2005년 1월 남대문 시장의 모습. ⓒ 오마이뉴스 남소연


우리 집은 IMF때부터 지금까지 사는 것이 나아지질 않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봐도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말하는 경제 성장은 우리들과는 무관한 나라 같습니다.

주5일 근무가 시작된 지도 여러 해가 지났지만 봉제 하청공장에서 재단 일을 하는 남편은 토요일은 당연히 출근하고 일요일도 쉬는 날과 일하는 날이 반반일 정도입니다. 한달치 월급이 서너 번 나눠서 나오는 건 예사고, 그나마 다 받으면 괜찮지만 그나마도 받질 못합니다.

내가 떡볶이 장사해서 번 돈으로 생활비를 겨우 꾸려가야 하니 남편 회사 사장님의 경영능력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일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데 월급을 제대로 못 주는 걸 보면….

어떻게든 사람은 살아집니다만

몇 군데를 옮겨 다녀봐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봉제 하청공장들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남편은 지금도 못 받은 월급은 몇백 만원입니다. 조금씩 받아오는, 월급 같지도 않은 월급으로 근근이 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남편을 많이 원망해 봤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을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 오히려 안쓰러워 눈물을 흘리기도 여러 번. 사는 게 나만 팍팍한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 서로 위안 아닌 위안을 삼곤 합니다.

우리집은 남들 다하는 외식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아이들 옷은 다 얻어서 입히고, 생활용품도 폐지줍는 할머니가 주워주시는 걸로 많이 쓰곤 합니다.

남들은 도통 그런 나를 이해하지도 못 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해를 바라지도 않지만요.

남의 눈이 무슨 상관이랴. 할머니가 주워 주는 우산이 멀쩡하면 비오는 날 쓰면 되고, 멀쩡한 신발장을 주워서 가져다주면 고맙다고 하고 쓰곤 합니다. 할머니께 고맙다며 국수 한 그릇 가져다 드리면, 할머니는 또 주워서 감춰두었던 냄비나 아이들 장난감을 주시곤 하지요.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산 사람은 다 산다는 게 맞는 말인가 봅니다. 주운 냄비라고 해서 물이 늦게 끓는 것도 아니고, 주운 우산이라고 해서 '헌 것'이라고 써있는 것도 아니고 비만 새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요.

젊은 여자가 궁상맞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 나는 내 멋대로 살면 그것이 내 방식대로의 삶이 되는 것이지 남의 눈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끊긴 도시가스... "엄마, 라면맛이 이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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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11월 모습. 인천시 서구 연희동에 있는 한 빌라 가스배관실을 열어보니 총 8가구 중 4가구의 가스관에 가스가 끊겼음을 알리는 '주의' 딱지가 붙어 있다. ⓒ 남소연

그런데, 오늘 아침 일곱 살짜리 딸아이가 라면이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물을 끓이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도시가스 직원이라기에 문을 열었더니 가스요금을 3개월 동안 내지 않아 도시가스를 지금 끊어야겠다고 했습니다.

"아저씨, 제가 빌려서라도 어떻게 해 볼 테니 오늘만 봐주시면 안돼요?"

그러자 남자는 말했습니다.

"어제 납부하라고 최종통보를 해서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 라면만 끓여서 아이 먹일게요. 조금만 있다 끊으시면 안 되나요?"
"우린 시키는 대로 해야 하기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습니다. 이제 막 라면을 넣은 터라 면이 다 끓지도 않았는데 잠시 후에 가스불이 꺼졌습니다.

아이는 자꾸만 라면을 달라고 보챘습니다. 라면을 먹을 수가 없다고 해봐도 막무가내로 "왜 끓여놓은 라면을 안 주냐"며 울먹입니다. 할 수 없이 다 끓지도 않은 라면을 아이에게 줬습니다.

"엄마, 라면이 잘 안 씹혀요. 그리고 무슨 냄새가 나요."

아이는 몇 젓가락을 먹더니 라면이 이상하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았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20년째 봉제공장을 충실하게 다니며 재단 일을 하는 성실한 남편에게 전화했습니다.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아오면서 바보같이 그렇게 죽어라고 일을 하느냐며 남편의 속을 후벼팠습니다. 남편은 걱정하지 말라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어둠이 이렇게 긴데, 새벽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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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 부유층의 상징으로 떠오른 타워팰리스가 포이동 판자촌 지척에 들어서면서 상대적인 빈곤의 그늘이 깊어졌다(기사와 특정 관련이 없습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하루종일 걱정만 하다가 3층 아줌마에게 사정 이야기를 한 후 돈을 빌려 가스요금을 냈습니다.

저녁엔 덜 끓은 라면이 아닌, 퉁퉁 불도록 끊인 라면을 아이에게 줬습니다. 아이는 '아침에 먹은 라면은 너무 이상했는데 저녁에 먹는 라면이 너무 맛있다'며 잘 먹습니다.

나같이 사는 사람이 대한민국엔 수두룩하겠지요. 아니,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겠지요. 아이에게 라면을 사주지도 못하는 사람도 수두룩하겠지요.

언젠가 개그우먼 조혜련씨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나와서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빨리 온답니다"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 프로를 보던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그 어둠이 너무 길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게 생겼네….'

그 새벽이 내게도 빨리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떡볶이를 휘휘 저으며 마음을 달랩니다.

덧붙이는 글 | 라디오 프로에도 보낼 생각입니다.

덧붙이는 글 라디오 프로에도 보낼 생각입니다.
#빈곤 #노점상 #도시가스 #양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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