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덕리 바로 옆 마을, 구장리와 바다... 난 이렇게 유명하지 않은 마을이 더 좋다이현숙
어제 방을 구할 때부터 민박집 주인의 말씨가 어째 낯익었다. 서울 말씨라면 혹시 서울사람? 밖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도 역시 같은 느낌이다. 나가다가 물어봐야지. 짐을 다 꾸리고 방문을 연다. 어제 아주머니가 오늘은 어딘가를 간다고 하더니, 아저씨 혼자 텃밭에 물을 주고 있다.
"혹시 서울에서 오셨어요?"
"그랬지요. 지금도 막내딸은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상계동에…. 오늘 집사람이 올라갔지요."
"서울에 있다가 여기 살면 답답하지 않으세요?"
"어휴 서울이 답답하지요. 여기가 뭐가 답답해요. 심심하면 낚시로 물고기 몇 마리 잡아다가 회 떠서 소주 한 잔 마시고 여기가 얼마나 좋은데요. 서울 가면 진짜 답답해요."
에고 부럽다. 좋은 건 알지만 거의가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놀아 마음만 좋은 곳에서 떠돌고 몸은 복잡한 서울에 남아 있는 게 보통인데….
이분들은 여기에 내려온 지 10년째란다. 처음부터 민박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손님이 어찌나 많이 오는지 본채만으로는 힘들어, 옆에다 우리가 잔 황토집을 짓고 아예 민박을 하게 되었단다. 시골에 살고 싶어 소양강 쪽과 청산도(전남 완도군)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민물고기는 회로 먹을 수 없는데 바닷고기는 회로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청산도로 내려왔다고. 낚시를 어지간히 좋아하시는 분 같다.
내가 보기에도 이곳 풍경은 빼어나다. 방에서도 해송과 들판과 바다가 보인다. 짐을 꾸려 나오다가 들른 바닷가는 정말 최고. 떠나기 싫을 정도로 삼삼한 경치인데 포구 이름이 뭐냐니까 이름이 없단다. 그래서 우린 그냥 권덕리 바다라고 부르기로 했다.
권덕리에서 나와 길을 달리는데 바로 옆 동네가 절경이다. 그냥 갈 수 없잖아. 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려 바다를 바라본다. 이 마을 이름은 구장리. 이 마을은 꿈에서도 한 폭의 그림으로 나타나리라.
이름도 없는 이런 마을에 비하면 영화 촬영지나 해수욕장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관광지로 때가 탄 느낌이랄까, 암튼 너무 손질을 한 탓으로 본질이 떠나 버리고 껍질만 남은 것 같다. 그래서 <서편제> 촬영지나 <봄의 왈츠> 촬영지는 그저 눈으로 한 번 보는 걸로 만족하고 길을 떠난다. 그런데 <봄의 왈츠> 촬영지 옆으로 길이 나 있다. 눈에 보이는 건 숲이 우거진 산뿐인데.
호기심이 동한 기사, 머리를 갸웃거리며 그쪽으로 핸들을 돌린다. 이건 모험인데,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험준한 히말라야나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곳에 대한 정보는 조그맣게 쓰인 화랑포라는 팻말이 전부. 길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차를 돌릴만한 장소는 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차는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