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지능적인 성폭행 사건

[태종 이방원 95]내은이와 실구지

등록 2007.05.30 21:02수정 2007.05.31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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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개혁을 실시하여 왕위승계의 기틀을 확립한 태종 이방원은 2차 관제개혁을 단행했다. 관료들을 다 잡아 고삐를 틀어쥐기 위해서다. 임무가 중복되거나 불필요한 청사(聽司)를 통폐합하고 사헌부의 사헌장령(司憲掌令) 한승안과 형조의 형조정랑(刑曹正郞) 최견 그리고 형조도관 정랑(刑曹都官正郞) 조환을 궁으로 불러 들였다.

임금이 대사헌이나 형조판서를 불러들이지 않고 장령과 정랑을 불러들인 것은 관례에 없던 이례적인 일이다. 요새 말로 풀이하면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부장검사와 과장급을 불러들인 것이다.


"옥송(獄訟)이 지체된다는 원성이 비등하고 있소. 옥송은 매일 결단하여 계본을 갖추어 보고하도록 하시오. 또한 백성들의 풍기가 문란하다 하니 철저히 규찰하시오."

사헌부에 불똥이 떨어졌다. 노비문제로 송사가 넘쳐나고 신문고 설치로 다툼이 끊이지 않는데 늑장부리지 말고 신속히 처결하고 매일 보고 하라니 죽을 맛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늑장부리면 냄새가 나고 냄새가 나면 줄줄이 옷을 벗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에 더하여 백성들의 풍속마저 단속하라니 아득했다. 이 때, 조선개국이래 최초의 위계에 의한 강간사건이 터졌다.

조선 최초의 지능적인 성폭행 사건

몇 년 전, 11세 여자아이를 강간한 사노(私奴) 잉읍금을 교형에 처한 일이 있었지만 그 사건하고는 격이 달랐다. 종(婢)이 주인집 규수를 계획적으로 겁탈하여 아내로 삼고 재산을 빼앗으려 한 사건이었다.

한양에 판사(判事) 이자지(李自知)가 살고 있었다. 판사는 전문성이 떨어지는 지방 관리를 감시하고 보필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다. 이름이 해괴하여 이 판사, 이 아무개 등으로 표기하려 했지만 여태껏 역사적인 인물을 실명으로 기록하더니만 웬 뚱딴지같은 일이냐고 의아해 하시는 분이 있을까봐 기록에 충실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받아들이면 남성 성기를 칭하는 비속어에 속하지만 그 당시에는 김자지, 박자지, 최자지 등 이름에 널리 쓰였다. 말과 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아마 그 당시에는 남성 성기를 자지라 칭하지 않고 지읒에 시옷받침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부분은 국어학자들이 규명할 일이라 더 이상 언급은 자제하겠다.

이자지(李自知). 스스로 자(自)자에 알지(知)자. 스스로 자신을 알고 행동한다.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 라는 경구를 자신의 철학적 출발점으로 삼았던 소크라테스보다도 더 자신감이 있지 않은가? 아무튼 한양에 이자지라는 판사가 살고 있었는데 일찍 죽었다. 지아비를 여윈 아내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어느 날 갑자기 천애의 고아가 된 이 판사의 딸 셋은 맏언니 내은이(內隱伊)가 챙겼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셈이다. 내은이는 몸종 연지와 소노를 데리고 가정을 꾸려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가노(家奴) 실구지(實仇知)가 찾아왔다.

"아가씨, 우리가 살고 있는 과주로 내려가 살면 안 될까요?"

실구지는 이판사의 전답이 있는 과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이 판사가 살아 있을 때는 주인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가노였으나 이 판사가 돌아가자 태도가 바뀌었다. 나이 어린 아이들 여자 셋만 남게 되자 주인 행세를 하며 주인집 딸들을 무시했다. 한마디로 종이 상전에게 기어오른 셈이다.

"여자의 도리는 안방문(閨門)을 나가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지금 부모님 삼년상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해서 무엇 하겠느냐?"

내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부모님의 삼년상을 여기에서 치러야 하겠다는 뜻이다. 사대부집 딸이라 글을 읽었고 배운 것도 있었다.

"상전의 의식(衣食)이 나에게 있으나 만일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장차 농사를 돌보지 않고 도망가겠습니다."

으름장이었다. 농사를 자신이 짓고 있으니 농사를 지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느냐는 협박이었다. 내은이는 겁이 덜컥 났다. 실구지가 농사를 지어주지 않으면 당장에 굶어죽을 것만 같았다. 주변에는 누구하나 상의할 사람도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내은이는 실구지의 의견에 따라 과천으로 이주했다.

장지문이 스르륵 열리고 나타난 검은 그림자

과천으로 이사 온 첫날밤. 잠 못 이루는 내은이에게 지게문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어 왔다. 뒤척이던 내은이는 몸을 반쯤 일으켜 동생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이 어린 두 동생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내은이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곤하게 잠들어 있는 동생들이 깰까봐 조용히 자리에 누었다.

그 때였다. 장지문이 스르륵 열리며 검은 그림자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겁에 질린 내은이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 온 괴한은 내은이의 입을 틀어막고 옷을 벗기려 들었다. 내은이는 있는 힘을 다하여 저항했다. 어둠에 파묻힌 괴한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내은이의 반항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한 괴한은 내은이의 저고리 섶을 나꿔채 힘을 가했다. 좌아악 소리와 함께 내은이의 저고리가 찢어지고 젖무덤이 드러났다. 터질듯 한 젖무덤이다. 아직 사내의 손길을 타지 않은 순백의 피부였다. 문틈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내은이의 젖무덤을 바라보던 괴한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동물적인 웃음을 흘리던 괴한이 내은이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내은이가 사력을 다하여 저항하자 내은이의 치마를 붙잡은 검은 손이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쫘아악 소리와 함께 치마가 찢어지며 내은이의 속살이 드러났다.

지게문 사이로 새 들어오는 달빛에 내은이의 우윳빛 속살이 눈부시다. 고개 숙여 흐느끼고 있었지만 귀밑머리에서 흘러내린 어깨선이 상아를 깎아 내린 듯 유난히 아름답다. 내은이는 속살이 아름다운 보기 드문 여인이었다.

"처남은 이 계집을 맡아."

어둠속의 목소리는 분명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내은이를 또 다른 사내에게 맡긴 괴한은 곤히 잠들어 있는 내은이의 두 동생을 깨워 발가벗겼다. 이제 열 살, 열세 살, 어린 여자 아이들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깨어난 두 동생은 발가벗긴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내은이가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치며 소리쳤지만 메아리는 없었다.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집에 구원의 손길은 없었다.

어린것들을 겁탈한 괴한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하품을 했다. 짐승 같은 포만감의 표출이었다. 또 다른 괴한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여자를 발가벗겨 주었는데 왜 아직 처리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눈초리였다. 발가벗긴 내은이와 승강이 하던 괴한은 내은이의 저항에 부딪쳐 야욕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멍! 멍! 멍!

구름에 달 가듯이 달에 구름 가듯이 밤하늘에 흐르는 달그림자를 보고 놀랐는가? 동구 밖 물방앗간에 몰래 숨어 들어가는 아랫마을 돌쇠와 과부댁을 보고 컹컹대는가? 이때 아랫마을 개 짖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들려왔다. 밤하늘엔 별이 쏟아지고 또 다시 숨 막히는 적막 속에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새벽 5경, 여명이 밝아왔다. 사내의 억센 완력에 지친 내은이가 실신하듯 무너져 내렸다. 때는 이때다 싶은 괴한은 내은이를 겁탈했다. 야욕을 채운 그들은 어둠이 걷히자 문밖으로 사라졌다. 이제야 내은이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았다. 어린것들을 겁탈한 괴한은 가노 실구지였고 내은이의 손발을 묶고 강제로 범한 괴한은 실구지의 처남 박질이었다.

국기를 뒤흔든 사건

실신하듯 쓰러져 있던 내은이는 정신을 차렸다.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처구니없었다.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옷도 챙겨 입지 못한 내은이는 그 자리에 쓰려져 한없이 흐느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내은이는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해봤지만 답이 없었다.

"이대로 실구지의 여자가 되어야 하나?"
"이 일을 천하에 터뜨려 실구지를 죄 줄 것인가?"
"그렇다면 사내의 손길이 지나간 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정신없이 집을 빠져나온 내은이는 관가에 찾아가 실구지를 고발했다. 실구지와 박질을 잡아다 국문하니 사실대로 토설했다. 의정부의 보고를 받은 태종 이방원은 죄인 실구지와 박질을 대명률에 따라 능지처참(凌陵遲處斬) 하라 명했다.

이 사건은 단순 강간 사건이 아니라 국기(國紀)를 뒤흔든 사건으로 인식했다. 때문에 대역 죄인을 다스리는 대명률(大明律)을 적용했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신분사회에서 상전을 능욕하여 아내로 삼으려 한 것은 계급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양갓집 규수를 겁탈하여 재산을 빼앗으려 한 것은 지능적인 범죄로 규정하고 극형으로 단죄했다.
#내은이 #실구지 #성폭행 #강간 #겁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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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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