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방직 앞에서 박순희 원풍모방 노조 전지부장이 인천지역 노동자들에게 70년대 당시 동일방직 노조의 투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장호영
"1972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어용노조를 물리치고 주길자 지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집행부를 뽑았어. 그 당시만 해도 남자가 독식하고 있던 어용노조를 깨고 여자가 민주노조의 지부장에 당선된 것은 정말 획기적인 사건이었지. 회사와 당시 어용노조였던 한국노총과 산별노조는 계속적으로 노조 집행부를 바꾸기 위해 공작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1976년 여성노동자 400명이 회사에서 농성을 벌인 일이 생겼지.
경찰이 침투해 연행하려 했고 이에 모두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반나체의 상태에서 노동가를 부르며 저항했지만 두들겨 맞으며 결국 모두 연행 당했어. 이게 바로 동일방직 나체시위 사건이지. 1978년 2월에는 노조 대의원 선거를 막으려는 사측의 노동자들이 노조 간부들과 선거를 하러오는 조합원들에게 똥물을 쏟아 붓는 똥물사건도 있었지.
그때 조합원 124명이 해고됐고 최근에서야 원풍모방, 대우어패럴 노조운동과 함께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복직을 못하고 있어. 노동현실은 아직도 크게 나아지지 못한 것 같아."
70년대 원풍모방노동조합의 부지부장이었던 박순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가 17일 오전 9시 30분께 동일방직(인천 중구 만석동) 앞에 모인 인천지역 노동자들에게 피와 땀이 서려있는 동일방직노조의 역사를 설명했다.
당시 인천 동일방직에는 민주노조를 만들고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 속에 발생한 반나체 시위와 똥물사건, 노조활동으로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정권이 블랙리스트를 덧씌우는 악습이 만들어지는 등 역사의 획을 긋는 사건들이 많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1976~78년까지의 동일방직사건은 자본의 억압에 굴복한 한국노총과 산별노조, 국가권력과 자본의 3부 합작에 의해 획책된 노조 파괴에 노동자들이 정면으로 대항한 전형적인 예로 꼽히고 있다.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자센터는 인천지역 노동자 50여명과 함께 70~80년대 노동운동의 역사 현장인 동일방직과 구로공단 등을 돌아보는 노동역사문화기행을 17일 진행했다.
가톨릭 주안노동사목의 박북실 수녀는 "노동운동이 많이 어렵다는데, 예전 70~80년대 선배 노동자들의 역사를 배움으로써 앞으로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을 잘 만들어가는 주춧돌이 될 수 있겠다는 고민 속에서 노동역사문화기행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동일방직을 떠나 198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에서 구로동맹파업이 벌어졌던 구로공단을 방문했다.
당시 효성물산노조 지부장이었던 김영미 대동두하나(주) 전무이사는 "가리봉5거리에서 구로공단으로 향하는 입구에 마주하고 있던 효성물산과 대우어패럴의 노동자들 1000명이 나와 노동가를 부르기만 해도 8만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심장이 술렁거렸어. 닭장집이라 불리는 한 달 3만원짜리 노동자들의 숙소가 가리봉5거리 너머에 있어 구로공단 모든 노동자들이 출퇴근 시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했기에 가능했던 일인 것 같아"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5년 6월 22일 경찰이 대우어패럴 노조 지부장 등 3명을 구속하자 인근에 있던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부흥사 등 10개 노조가 연이어 동맹파업과 연대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구로동맹파업이다. 대우어패럴노조에 대한 탄압이 민주노조의 각개격파를 위한 신호탄이라 인식한 노조들은 70년대 민주노조의 파괴과정을 다시 되풀이 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연대투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경찰과 사측의 무차별 난타와 강제 해산 속에 구로동맹파업은 6일 만에 막을 내리고 43명의 구속과 38명 불구속 입건, 47명 구류, 700여명의 해고와 강제사직을 낳았지만 구로동맹파업은 무엇보다 기업별 노조에 함몰되지 않고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노조운동의 발전가능성을 제시해줬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