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한 일도 처벌할 수 있다?

[태종 이방원 122]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라

등록 2007.07.13 08:35수정 2007.07.1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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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광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시정은 살벌했고 민심은 흉흉했다. 대소신료는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공포분위기다. 이럴 때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 삼족이 멸하게 된다. 이럴 때일수록 바짝 엎드려 있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민무질 이무 사건을 밀고 갔던 지휘부에서는 더욱 바짝 죄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관료들의 불평을 방치하거나 백성들의 웅성거림을 방관하면 자신들이 과(過)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되면 권력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고 무소불위의 칼날이 무디어진다고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공안당국의 생리가 그렇다.


희생양을 찾고 있던 이들의 정보망에 먹잇감이 포착되었다. '이무 괴담'이다. 도성에 '왕위가 바뀐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왕위가 바뀐다는 것은 현 왕을 부정하고 임금의 퇴출을 의미하는 불경스러운 말이다. 대역무도의 죄를 씌울 수 있다.

민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순금사에서 역추적에 나섰다. 그러나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진 소문의 진원지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숭례문 밖 저잣거리와 삼개 나루터를 이 잡듯이 뒤졌으나 헛수고였다.

피맛골을 뒤져 소문의 진원지를 밝혀내다

탐문의 범위를 성내로 압축한 순금사는 종루와 운종가를 샅샅이 흩었다. 저인망식 홀치기다. 그러나 소득이 없었다. 피맛골 곰보댁 국밥집에 불경스러워 보이는 사내들이 드나든다는 첩보를 입수한 순금사는 망원을 투입했다.

"어, 여기 탁배기 두 사발만 주쇼."


아니나 다를까 얼굴에 마마 자국이 선명한 곰보댁이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탁배기가 담긴 호리병을 가지고 왔다.

"혼자 오셔 나물래 두 사발이라뇨?"


강한 평안도 억양이 섞인 개경 말이었다. 곰보댁 국밥집은 개경정권에 심정적으로 동정을 보내고 있는 고려 유민들이 주로 드나드는 국밥집이었다.

"한 사람은 소피보러 갔수다래, 림자도 개경이우?"
"그렇수다래, 서방 따라 한양 왔더니만 고생만 직사하게 허구 못살겠슴메,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시다."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던 곰보댁이 사발에 탁배기를 가득 쳐주고 뒤돌아 가며 또 다시 중얼 거렸다.

"이렇게 많이 죽어 나갔는데 원 세상이 이래서야…."

이무와 민무구 형제가 처형되고 많은 사람들이 참형에 처해진 안타까움을 혼잣말처럼 주절거림이었다. 이때였다. 구석진 자리에서 국밥에 탁배기를 걸치던 일단의 무리 중에 한 사내가 칼칼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벌을 받을 놈들이지…. 이럴 때 벼락은 왜 놀고 있는지 모르겠어?"
"푸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이무 정승이 아까운 인물이야."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을 놓칠 리 없는 순금사 망원은 이들에게 접근하여 소문의 진원지를 밝혀냈다. 인달방에 살고 있는 한용이라는 사람이었다.

매에 장사 없다, 무조건 패라

"왕위가 바뀔 것이라고 한 말이 네가 지어낸 말이 맞으렸다?"

순금사에 투옥된 한용에게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지가 한 말은 맞습니다만 지가 지어낸 말은 아닙니다요."
"누구한테 들었느냐?"
"정인수라는 사람한테 들었습니다요."

정인수와 한용은 같은 동네 사람이다. 즉시 정인수를 잡아들였다.

"네가 지어낸 말이 맞으렸다?"
"아닙니다요. 꿈에서 그랬습니다."

심문하던 옥관은 맥이 풀렸다.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 꿈에서 누가 그러더냐?"

"지가 잠을 자고 있는데 이무 정승이 왕이 되어 의장을 갖추고 길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봤습니다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한용에게 했는데 그게 무슨 큰 잘못이라도 됐습니까요?" - <태종실록>

정인수는 매를 맞으면서도 할 말은 했다. 어이없는 심문이었지만 그래도 국가와 관련된 예민한 문제였으므로 계통을 따라 태종에게 보고했다.

꿈에서 본 것을 어떻게 처벌할 수 있느냐?

"꿈에서는 하늘에도 오르고 공중에도 나르고 탄환허망(誕幻虛妄)하여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꿈에 큰 일을 보고 남과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죄이다." - <태종실록>

보고를 받은 태종은 곤장을 때려 석방하라고 순금사에 명했다. 하지만 파문이 일었다. 왕위와 국가를 거론하는 것은 곧 국사범이다. 이렇게 큰 죄인을 어떻게 석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의정부에서 들고 일어났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낮에 한 일을 밤에 꿈꾸는 것이다' 하였으니 정인수가 평일에 이러한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러한 꿈을 꾸었겠습니까? 비록 실지로 꿈을 꾸었다 하더라도 깨어난 뒤에는 마땅히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발설하지 않았어야 할 것인데 의심치 않고 발설하였으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꿈 속의 일을 가지고 실형으로 처단할 수 있겠는가?"

"꿈이 비록 허탄한 것이긴 하나 이무가 왕이 된 꿈을 꾸어 발설한 정인수는 부도한 것이고 또 그 말이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퍼뜨린 한용도 불궤한 것이오니 청컨대 큰 말을 발설한 율(說大言語律)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 <태종실록>

한용과 정인수는 참형에 처해졌다. 목이 잘리는 형벌이다. 큰 말(大言)을 퍼뜨린 죄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적용된 율, 즉 설대언어율(說大言語律)은 대명률의 한 부분이다. 대명률이 헌법이라면 설대언어율은 반공법이나 국보법이나 긴급조치 위반죄와 같은 하위 법이다. 체제 즉, 왕권을 수호하기 위한 수단이다.

a 대명률

대명률 ⓒ 이정근

그럼 대명률을 살펴보자. 대명률은 명(明)이라는 글자에서 짐작이 가듯이 명나라의 홍무제가 1374년 제정한 명나라 법률이다. 이를 우리니라의 고사경과 김지가 편찬한 것이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다. 조선은 명나라의 법률을 무삭제 수입한 것이다.

제정당시에는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의 오형(五刑)이었으나 자자(刺字)와 능지처사(凌遲處死)와 같은 극형을 추가했다. 명나라는 황권수호 차원이었고 우리나라는 왕권수호 차원이었다.

한용과 정인수가 처형된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터무니없는 죄명으로 백성을 죽인 권력도 나쁘지만 큰 말(大言)의 올가미가 두려운 대다수의 백성들이 침묵했다고 비난하지 말자. 그들이 거리에서 처형될 때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하며 히득거렸던 백성들이 우매했다고 욕하지 말자. 자신의 얼굴에 침 뱉는 격이다.

큰 말(大言)을 뜯어보자. 큰 말이란 최고 권력이 금기시하는 말이고 그 말의 발언은 최고 권력자로서는 도전으로 간주했고 발언자는 양심으로 생각했다. 정인수가 꿈이라고 변명했지만 횡포를 일삼는 권력에 대한 소망일 수 있다.

옛 사람을 비판하면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다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인 것 같지만 우리의 최근 세사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지금은 예사로운 말이 되었으나 이승만 치하에서 '통일'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었다가 사형에 처해져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혀있는 사람이 있다. 박정희 시대 '유신철폐'를 사주했다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8인이 있다. 그것도 확정판결 18시간 만이다.

'개헌'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만 해도 어두운 지하실에 끌려가 곤혹을 치르고 더 큰 죄를 씌워 죽음으로 내몰았던 전두환 시대도 있었다. 이때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었지만 대부분의 언론과 국민들은 침묵했다. 영합한 자들이 더 많았다. 한용과 정인수가 살았던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이 600년 전 그 시대 백성들보다 용기 있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양심에 따른 행동과 목소리를 낸 사람들은 역사와 자신에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태종 #대명률 #피맛골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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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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