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여명의 중국여성들이 일하고 있는 봉제공장.김혜원
한국에서도 팍팍한 삶을 살았지만 중국에서 역시 그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동생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120여명의 직원들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그가 맡은 일이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출근 시간은 오전 7시 40분이지만 왕언니의 출근은 그보다 이른 오전 6시 30분에 시작한단다. 오전 6시 30분부터 장에 나가 120인분의 장을 보고 10시 이전에는 돌아와야 낮 12시 점심시간에 맞추어 음식장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공장 애들 대부분이 기숙사 생활을 하거든요. 중간에 결혼을 해서 밖에 사는 아이들도 있지만 하루 세 끼는 모두 공장에서 먹지요. 그러다 보니 이틀에 한번씩은 큰 장을 보아야 해요. 식재료를 사와서 분류하고, 다듬고, 저장하는 일이지만 워낙 재료가 많으니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도 힘이 들지요. 그래도 그 일만 하고 나면 좀 시간이 남아 교회 봉사도 나가고 블로그에 글도 쓰고 그런답니다."
<오마이뉴스>와는 어떤 인연으로 가까워지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강화도에 사시는 전갑남 기자의 부인과 함께 공부를 했어요. 저도 마흔이 넘어서 방송통신대학을 다녔거든요. 사는 게 바빠서 대학원 진학은 포기 할 수 밖에 없었지만 …. 컴퓨터도 그때 배웠어요. 전갑남 기자의 부인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전갑남 기자 기사를 찾아 읽고 댓글도 달고 그러다가 <오마이뉴스> 블로그까지 진출하게 되었지요."
중국이야기가 '사는이야기' 섹션의 기사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면서 기자로 활동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젓는다. 그저 자신의 팍팍한 삶을 털어놓은 개인적인 수다 같은 데다가 대부분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고단한 이야기다 보니 기사로 내놓고 싶지 않은 것이란다. 또 너무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알려지는 것도 그리 반갑지만은 않단다.
"제가 쓰는 이야기가 즐겁고 행복하지는 않거든요. 지금의 제 삶처럼 말이죠. 제 글을 좋아 해주시는 이웃들이 있어서 보람도 있고 행복하기도 하지만 가끔씩은 내가 너무 궁상스런 이야기만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 두려워요. 제 글이 <오마이뉴스> 메인면에 올라왔을 때는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몰라요. 어찌나 부담이 되던지 얼른 내려줬으면 싶더라구요."
'고단한 삶'에서 '단단한 삶'으로
지난 4년 동안의 중국생활에서 그는 더 많이 단단해졌다. 작은 문제만 생겨도 눈물바람을 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던 그가 지금은 오히려 11년차 베테랑인 동생에게 조언을 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종업원이 속을 썩이거나 클레임을 먹을 때면 다 때려치우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 버리자고 하지요. 하지만 지금 돌아가면 지난 11년 고생은 다 헛거인 걸요. 큰 돈 번 것도 없이 뼈빠지게 일한 게 전부에요. 납품일과의 싸움, 종업원들과의 싸움, 불량과의 싸움…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어려운 건 한국에서나 해외에서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외국에서 들어오는 주문을 하청 생산해서 전량 다시 수출해야 하는 임가공 봉제공장은 일의 양에 비해 수익은 적다고 한다. 동생의 일솜씨와 성실성이 소문이 나면서 외국 주문은 늘어나고 있지만 워낙 싼 임가공료와 가끔 일어나는 클레임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큼 형편은 좋아지지 않는다고.
왕언니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수시장을 생각하고 있단다. 공장이 있는 청도에 가게를 하나 내고 중국 내수시장에까지 물건을 팔아 임가공료에만 의존하는 수익구조를 탈피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 진출한 임가공업이 내수시장에 물건을 내기 위해서는 새롭게 허가를 내야하고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는 과정도 쉽지만은 않기에 엄두를 못 내고 속만 태우고 있는 것이 대부분 중국 진출 임가공업종이 겪는 한계라고 한다.
싼 현지 임금과 세제혜택, 저렴한 공장임대료 등 좋은 조건으로 중소임가공업의 희망진출 1위국이었던 중국이지만 최근에는 줄어든 세제혜택과 노동법 강화 등으로 오히려 중국을 떠나 인도네시아·베트남 등 다른 나라로 가는 기업들이 줄을 잇고 있다. 더 이상 중국땅이 임가공업의 천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한국 아줌마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