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눈물, 그 진정한 의미를 이무기는 모른다

[태종 이방원 142]신하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군주

등록 2007.08.15 12:30수정 2007.08.15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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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릉. 태종이 가장 힘들어할 때 도참의 대가 하륜이 잡아준 자리이다 ⓒ 이정근

이숙번을 바라보는 태종의 시선은 싸늘했다. 이숙번은 혁명 동지다. 광화문 앞에 천막을 치고 한솥밥을 먹고 밤을 새던 동지다. 하륜이 책사라면 이숙번은 무사다. 이숙번은 궂은일은 도맡아 처리하던 행동파다. 이 때문에 태종 이방원의 총애를 받았고 고속 승진했다. 하지만 오늘 그를 바라보는 태종 이방원의 눈빛은 달랐다.

"민무휼의 일은 이미 끝났다. 어찌 다시 청하는가? 누가 인정이 없을까마는 특별히 장모(外姑)가 있기 때문에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전하의 지극한 정리를 알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민무휼·민무회의 죄가 애매하여 사람들이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유사에 내려 그 죄를 밝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뒤에 특별히 넓은 은혜를 내리어 성명을 보전하시면 사은(私恩)과 공의(公義) 두 가지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삼성(三省)은 국가의 기강이므로 잠시도 비울 수 없으니 적당치 않거든 다른 사람으로 임명하고 그 죄가 없거든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삼성(三省)이 나오는 것은 막지 않겠지만 특별히 출사(出仕) 하도록 명하지는 않겠다. 명하여 출사하면 또 다시 전과 같을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으로 바꾸더라도 또 뒤를 이어 청할 것이다. 그러므로 즉시 임명하는 것 역시 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의 신자(臣子)로서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무릇 먹고 자는 사람이라면 누가 토죄(討罪)하여 충성을 다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또 전하가 비록 보전하고자 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거이도 능히 보전하였으니 이 예에 의하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세력의 힘을 믿는 자와 그 힘을 이용하는 사람

"이미 육조·대간에서 힐문하여 명백해지지 않았는가? 만일 유사(攸司)에 내리면 고문(栲問)을 할 터인데 특별히 다른 음모가 있어 화가 미칠까 염려된다."-<태종실록>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통찰력이다. 분명 검은 음모가 있고 음모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이다. 무서운 위인이다. 세력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힘의 세기를 가늠하고 반동력을 측정하고 있다니 두려운 존재다.

차기에 방점을 찍은 삼각편대의 목표는 동일하다. 차세대의 중심에 서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중심세력을 헤쳐 모이게 하려는 태종의 전략과 뭉쳐서 중심을 선점하려는 하륜의 전술과 이숙번의 전법은 다르다. 태종은 자신의 힘을 유보해두고 세력의 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숙번이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유사에 내려 줄 것을 간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원과 박신이 먼저 물러나고 이숙번과 박은이 남았다. 이숙번과 박은은 태종의 혁명 동지다.

"민무구·민무질이 손해를 본 까닭으로 복수할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 지난번 계사(啓事)에 두 형을 가련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을 귀양 보냈으니 내가 용서하더라도 어찌 덕(德)에 감사하겠는가? 국론이 원하니 송씨(宋氏)가 돌아간 뒤에 마땅히 이들을 버리겠다."

답이 나왔다. 쾌재를 부를만한 답이다. 하지만 이숙번은 표정관리를 했다. 송씨가 돌아간 뒤에 버리겠다는 임금의 말은 송씨 살아생전에 처치하면 장모가 마음 아파할까봐 그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국문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알고 있다."

긴 한숨을 내쉬던 태종의 시선이 천정에 꽂혔다.

"가물어서 벼가 마르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무슨 선(善)하지 못한 일이 쌓여서 이러한 재앙을 가져오는가? 내가 방문을 닫고 가만히 생각하니 살고 싶지가 않았다. 즉위한 이래로 백성을 복되게 한 것이 없다. 며칠 전 교하(交河) 백성들이 말하기를, '멸망할 때를 당하여 이런 재이(災異)가 있다'고 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천정을 응시하던 임금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사를 도모하는 대신은 서로 체대(遞代)되고 나는 오래 재위(在位)하였으니 세자에게 전위하여 조금은 근심과 걱정을 풀고자 하나 세자가 어려서 일을 경험하지 못하였으므로 또한 그렇게도 할 수도 없다. 누가 밤낮으로 이처럼 근심하고 고민하는 나의 마음을 알겠느냐?"

임금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탄식했다. 격정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회한이 강물처럼 밀려온 것이다. 뜨거운 통한이었다. 아버지를 향하여 혁명의 깃발을 올리던 기백은 간데없다. 약해진 모습이다. 정상에 오르는 길보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하고 힘든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용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무기는 모른다

태종은 등극 이후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하늘에 빌어도 소용이 없었다. 사람도 많이 죽였다. 저승까지 함께 가자고 삽혈맹세 했던 혁명동지도 죽였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죽이고 또 다시 민무휼, 민무회를 죽여야 하는 기로에 선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태종은 항상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회의가 들고 비탄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놀라운 변화다.

이숙번과 박은은 황공하고 놀라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방원의 눈물도 처음 봤고 임금의 눈물도 처음 봤다. 용의 눈물을 본 것이다. 하지만 임금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몰랐다. 박은과 이숙번은 황공하고 민망하여 편전을 물러 나왔다.

다음날, 태종은 하륜을 불렀다.

"하공! 나도 살날이 많지 않은 것 같소. 수릉을 보아주시오."

뜬금없는 소리다. 매사에 거침없이 치고 나가던 태종 이방원이 많이 심약해졌다. 수릉은 자신의 묘 자리다. 죽어서 들어갈 자리를 보아달라는 것이다.

"전하, 당치않은 말씀이십니다. 아직 춘추가 여 하신데 수릉이라니요?"

"하공의 그 뜻을 내 어찌 모르겠소. 하지만 내 청을 거역하지 마시오. 하공이 잡아준 자리에서 편히 쉬고 싶은 것이 내 소원이오."

말을 마친 태종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었다. 너무나 진지한 모습에 하륜이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처음 보는 참모습에 중언부언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하륜은 사양하지 못하고 편전을 물러나왔다.

하륜은 지신사(知申事) 유사눌을 대동하고 경기도 일대를 뒤졌다. '왕릉은 법궁에서 백리 이내에 있어야 한다' 라는 법도 때문에 멀리 갈 수 없었다. 드디어 찾아 낸 곳이 대모산 남쪽 명당이다. 태종이 승하하자 아들 세종은 당대의 풍수들이 다른 곳을 추천했으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대모산 아래 모셨다. 오늘날 헌릉이다.

하륜과 함께 대모산 명당을 답사한 태종은 흡족했다. 명당 터가 마음에 들었다. 역시 천하의 대가 하륜이라고 치하했다. 한강 건너 번잡한 정사를 잊어버리고 양지바른 곳에 누워있으면 편안할 것 같았다.

자신이 죽으면 들어갈 자리를 잡아둔 태종은 깊은 번민의 수렁에서 빠져 나왔다. 심기일전이다. 죽으면 들어갈 자리를 잡아둔 태종은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이방원 #하륜 #이숙번 #용 #이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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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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