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 알고 보니 책벌레들?

프랑스 군대가 파괴한 고려궁지와 원명원

등록 2007.08.21 08:35수정 2007.08.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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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려궁지의 빈터. 병인양요(1866년) 당시 프랑스군의 약탈·파괴로 건물 대부분이 사라졌다. 맞은편에 보이는 나무는 높이 16m 둘레 7m의 400년 된 보호수다.

고려궁지의 빈터. 병인양요(1866년) 당시 프랑스군의 약탈·파괴로 건물 대부분이 사라졌다. 맞은편에 보이는 나무는 높이 16m 둘레 7m의 400년 된 보호수다. ⓒ 김종성


지난 8월 19일 강화도에 있는 고려궁지(고려궁터)의 황량한 빈터를 돌아보면서, 지난 7월 23일 베이징에서 들른 원명원(웬밍웬) 서양루(西洋樓)의 폐허가 떠올랐다.

외국군에 의해 건물이 약탈·파괴된 것도 같고, 사건 발생시점도 1860년(원명원)과 1866년(고려궁지)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또 약탈·파괴의 주체가 영·프 연합군(원명원)과 프랑스군(고려궁지)이라는 점도 유사하다.

한편, 원명원에서는 석조 건물이 파괴된 반면, 고려궁지에서는 목조 건물이 파괴된 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또 원명원의 경우에는 중국정부가 일부러 잔해를 치우지 않은 데 반해, 고려궁지의 경우에는 조선정부가 잔해를 말끔히 치웠다는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a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영국군과 연합하여 약탈·파괴한 원명원의 모습.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영국군과 연합하여 약탈·파괴한 원명원의 모습. ⓒ 김종성


원명원의 폐허를 떠올려보면서 또 고려궁지의 황량함을 지켜보면서, 프랑스가 정말로 예술의 나라인가를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군이 영국군과 연합하여 약탈·파괴한 원명원 서양루는 청나라 황제 건륭제가 프랑스 로코코 양식을 본 따서 만든 건물이다. 아마 한국인들 같았으면, 머나먼 나라에서 자기 나라 건축양식을 모방해서 황실 건물을 지었다고 하면 그게 '대견해서라도' 그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려 했을 것이다. 자기 나라 건축양식을 본 딴 게 아니더라도,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잔혹하게 원명원을 파괴할 수 있었을까.

한편, 몽골 침략기간인 1232~1270년 시기에 고려의 궁궐 역할을 한 강화 고려궁지 역시 한때는 꽤 넓은 규모를 자랑하던 곳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강화유수부 청사로 쓰인 이곳에는 오늘날 동헌, 이방청, 강화부 종각, 외규장각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다. 원명원 서양루처럼 이곳도 프랑스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동헌·이방청만 보면 이곳이 고려궁지가 아니라 그냥 강화유수부 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외규장각 건물이 있어서, 그나마 이곳이 궁궐이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화군청 문화관광과 담당자의 말에 따르면, 외규장각은 지난 2004년에 국비 지원으로 복원된 건물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에 실제로 남아 있는 옛 건물은 동헌과 이방청 두 군데뿐인 셈이다. 프랑스 군인들이 아주 말끔하게 '정리'하고 간 것이다.

a 고려궁지에 남아 있는 세 동의 건물 중에서 외규장각(왼쪽)과 동헌(오른쪽)의 모습. 잔디 색깔이 아름다워서 폐허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모르는 외국인 같으면 ‘한국의 조상들은 스케일이 커서 잔디밭도 이렇게 크게 만들었나?’라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고려궁지에 남아 있는 세 동의 건물 중에서 외규장각(왼쪽)과 동헌(오른쪽)의 모습. 잔디 색깔이 아름다워서 폐허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모르는 외국인 같으면 ‘한국의 조상들은 스케일이 커서 잔디밭도 이렇게 크게 만들었나?’라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 김종성


궁터에 남아 있는 세 개의 건물을 제외하면, 고려궁지는 그야말로 황량한 빈터에 불과하다. 정원수를 조성해 놓은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잔디만 덮여 있을 뿐이다. 잔디를 비교적 예쁘게 관리해서인지, 이곳이 한때는 폐허였다는 사실이 제대로 실감나지도 않았다.


차라리 베이징 원명원처럼 이곳도 폐허 상태 그대로 보존해 두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명원을 찾는 중국인들이 그곳에서 제국주의침략자들의 만행을 느끼고 돌아가듯이, 고려궁지를 찾는 한국인들도 이곳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하기는 석조 잔해에 비해 목조 잔해는 그냥 내버려두더라도 언젠가는 썩고 말 터이니, 관리하기도 이만저만 힘들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예술의 나라라서 그런지, 원명원도 그렇고 고려궁지도 그렇고 프랑스인들은 남의 나라 건물을 정말 '예술적'으로 약탈·파괴하고 떠났다. 그들이 한성까지 쳐들어왔다면, 조선의 궁궐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a 외규장각.

외규장각. ⓒ 김종성


'프랑스가 정말로 예술의 나라 맞아?' '하기는 이런 파괴도 예술 창작을 위한 창조적 파괴였다는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라며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을 이리저리 해보다가, 외규장각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가 아니라 혹 책벌레들의 나라가 아닐까?'

조선 제22대 군주인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들을 보관할 목적으로 1781년에 설치한 외규장각은 한성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해놓은 의궤(儀軌)를 비롯해서 천여 권의 서적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병인양요 때에 고려궁지에 들이닥친 프랑스군이 이곳에서 345권의 책을 약탈해갔다. 나머지 책들은 그들의 방화에 의해서 모조리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에 약탈해간 도서 중에서 279권이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중에는 필사본이 없는 유일본이 63권이나 있다고 한다.

고려궁지가 불타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그 귀중한 책들만 훔쳐간 것을 보면, 프랑스인들은 예술이 아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인가 보다. 한국정부가 그토록 강력하게 반환요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끝까지 책을 붙들고 있는 걸 보면, 어쩌면 그들은 분명히 '하버드의 공부벌레들' 못지않은 책벌레 같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이 예술의 나라라며 치켜세워서 그렇지, 사실 프랑스인들도 제국주의침략 시절에 오늘날의 미국 부시 행정부 못지않게 만행을 저질렀다. 샹송과 에펠탑에 취한 나머지, 한국인들이 제국주의 시절 프랑스의 죄악을 잠시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한 어느 역사 연구자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 국립도서관 측에도 그 나름대로 항변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자신들은 합법적 방법으로 한국 고서들을 확보했다고 말이다.

물론 한국 고서들이 프랑스 함대로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까지 들어가는 과정은 합법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책이 외규장각에서 프랑스 함대에 실리기까지의 과정은 분명 불법적인 것이었다.

절도범이 훔친 재물을 범인의 아들이 갖고 있다면, 그 아들 역시 형법상의 장물취득죄 혹은 장물보관죄에 저촉될 가능성이 있다. 절도범인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돈 주고 샀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듣고 그냥 돌아설 경찰관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물'이 아직 프랑스 영역 안에 있는 한,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도서 획득과정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점을 보더라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한국측에게 '장물'을 무조건 반환해야 한다. 하기는 한국이 프랑스보다 훨씬 더 강한 나라였다면, 복잡한 법리를 운운할 필요도 없이 프랑스가 이미 오래 전에 고서들을 기꺼이 반환했을 것이다.

a 고려궁지 안에 있는 백일홍나무. 백일홍이 더 밝게 웃을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는 하루빨리 한국 고서들을 반환해야 할 것이다.

고려궁지 안에 있는 백일홍나무. 백일홍이 더 밝게 웃을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는 하루빨리 한국 고서들을 반환해야 할 것이다. ⓒ 김종성


지난 8월 1일 <뉴욕타임스> 등의 보도에 따르면, BC 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탈리아제 아프로디테 조각상 등 고미술품들이 이탈리아 정부의 집요한 노력 끝에 미국 LA 소재 폴 게티 미술관으로부터 반환될 예정이라고 한다.

폴 게티 미술관 측은 1800만 달러를 주고 이 조각상을 '합법적'으로 사들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물'이라는 이탈리아의 공세에 못 이겨 결국 반환하기로 약속하게 되었다.

아프로디테 조각상 반환은 프랑스 측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고서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국립도서관에까지 갔든지 간에, 그것은 원초적으로 장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이 정말로 책벌레라서 한국 고서들을 붙들고 있는 것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진정한 책벌레라면 그 책들을 꼭 읽고 싶어 하는 책 주인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훔쳐 온 책을 다 읽었으면, 주인에게 하루라도 빨리 돌려주는 것이 책벌레의 기본 태도일 것이다.

누구는 제2차 대전 패전국이라서 제국주의 시기의 잘못을 반성해야 하고, 누구는 승전국이라서 제국주의 시절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은 없다. 프랑스가 독일이나 일본 같은 나라들의 과거 잘못을 비판할 수 있으려면, 프랑스 자신도 과거 잘못을 청산하는 노력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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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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