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수집광 사건>동서문화사
펠 박사의 왕국은 영국의 시골에 있는 집이다. 삼면을 책으로 가득 메운 서재, 펠 박사는 그곳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거나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정원을 산책한다. 아니면 잔디밭의 한가운데에서 오후의 햇빛을 온몸에 받으며 낮잠을 잔다. 이도저도 아니면 동네의 선술집에서 맥주를 한바탕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무엇을 전공해서 어떤 학위를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모자수집광 사건>에서 그는 '영국에서 고대로부터 내려온 음주습관'이라는 제목의 책을 쓸 계획으로 7년째 자료를 수집하던 중이었다.
물론 펠 박사가 무엇을 전공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영국내에서 탐정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중에서도 도저히 있을 법 하지 않은 사건, 소위 '불가능범죄'에 도전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대가가 바로 기드온 펠 박사다.
'불가능범죄'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존 딕슨 카아의 작품에서는 이것을 밀실과 괴기로 한정해보자. 추리소설에서 기본적으로 범인은 탐정을 속이기 위해서 노력한다. 범인이 탐정을 속이려는 트릭이 극단적으로 나아갈수록, 그것은 불가능범죄에 가까워진다.
현장을 침입할 수 없는 밀실로 만들거나, 전해져오는 전설과 저주에 의한 죽음인 것처럼 꾸며두거나,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장하거나 하는 등의 트릭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살인처럼 보이는 자살도 있을 수 있고, 자살로 착각할 만한 살인도 있다. 이런 트릭은 간파하기도 어렵거니와 만들기도 어렵다. 카아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범인과 탐정 모두 이 방면에 있어서 일급의 두뇌와 대담함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기드온 펠 박사는 왜 밀실을 좋아했을까
기드온 펠 박사는 그 중심에 서서 수많은 트릭을 파헤치는 인물이다. <죽은 자가 깨어난다>에서 펠 박사는 스스로 고백한다. 자신에게는 괴이한 사건이나 불합리한 사건을 좋아한다는 약점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개의 관>에서는 온갖 추리작품과 탐정들을 인용하면서 밀실에 대한 강의를 늘어놓는다. <마녀가 사는 집>에서는 무서운 전설과 저주로 둘러싸인 사건을 해결한다. <연속살인사건>에서는 밀실에서 목을 매달고 죽어있는, 자살처럼 보이는 현장의 트릭을 간파해낸다.
이외에도 존 딕슨 카아는 작품 속에서 여러 가지로 괴기와 트릭, 전설을 뒤섞는다. 헨리 메리벨 경이 등장하는 <흑사장 살인사건>, 헨리 뱅코랑의 <밤에 걷다> <해골성>, 수수께끼의 인물 고던 크로스가 등장하는 <화형법정> 모두 그런 작품들이다. 그렇게 본다면 순수하게 트릭으로만 승부했던 <황제의 코담배케이스>가 오히려 의외인 작품이 될지 모른다.
존 딕슨 카아가 만든 여러 명의 탐정들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기드온 펠 박사에게 가장 호감이 간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쾌하고 우렁찬 말투, 맥주를 좋아하는 취향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모자수집광 사건> <연속살인사건>에서 보여주었던 범인에 대한 관대한 태도도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집착했던 불합리한 사건들의 매력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죽은 자가 깨어난다>에서 펠 박사는 범죄수사에 관해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어느 살인사건이나 중요한 점은 '누가, 어떻게, 왜'라는 측면이다. 이중에서 펠 박사는 가장 해명하기 어려운 것이 '왜'라는 부분이라고 한다. 범인은 왜 밀실을 만들었을까? 범인은 왜 마취제를 선택했을까? 범인은 왜 흉기를 버리고 갔을까? 범인은 왜 반지를 남겨두었을까? 펠 박사는 이런 부분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면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라는 질문을 펠 박사에게 던져보면 어떨까. 기드온 펠 박사는 왜 하필이면 기이하고 불가능한 사건들에 유독 관심을 가졌을까. <세개의 관>에서 펠 박사는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한 취향'을 말한다. 펠 박사가 취급했던 사건들이야말로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사건들이었다. 기이한 사건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 펠 박사는 거기에 매료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추리소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매력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불멸의 탐정들]이라는 소제목으로, 고전추리소설의 영웅인 탐정에 관한 글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세 개의 관
존 딕슨 카 지음, 김민영 옮김,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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