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7.08.22 10:43

수정 2007.08.22 13:08

▲ 책 표지 ⓒ 북하우스

고교 2학년 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친구가 3학년에 올라가서 전교 10등 밖으로 밀려나자 거식증에 시달렸다. 폭식과 구토를 반복한다는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동안 그 아이의 몸은 점점 말라갔다.

비정상적으로 보일만큼 마른 체형으로 변하던 친구는 일주일 남짓 집에서 쉬면서 치료를 받았다. 그녀가 우리들 곁으로 돌아왔을 때, 가는 팔다리에 비해 통통하게 살이 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폭식과 구토의 순환을 끊었다는 윤주희씨의 얼굴을 보면서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시 우리는 그 친구가 시험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전교 1등이나 10등이나 평범한 우리들이 보기에는 모두 좋은 성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몸을 힘들게 할 만큼 정신적 고통이 컸을 수도 있음을 윤주희씨의 삶을 통해 이해한다. 대개 자기 자신의 고통은 다른 사람의 것보다 몇 배나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족들과 보낸 정겨운 시간을 기억하는 나이에 네덜란드로 입양 갔다는 사실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을 것이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또 한번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강박증을 통해 그녀가 겪었던 정신적 고통을 가늠할 수 있었다.

정상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한 아이들이라면 아빠나 엄마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무한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대여섯 살짜리 꼬마가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청소를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네덜란드에서 살아온 삶은 힘겹기 이를 데 없었다. 삶의 윤택함이야 당시 한국보다 나았겠지만 사람이 어디 밥으로만 살던가. 그녀의 이야기는 물질의 풍요가 끊어진 관계를 대신해줄 수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폭식과 구토의 반복하게 된 것도 애초에 성적만큼이나 완벽한 육체를 꿈꾼 데서 비롯했다. 사랑받을 만큼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증이 불러온 병이었다.

윤주희씨의 삶을 통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맺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됐다. 고슴도치 사랑이라고 할 만큼 부모는 자식의 잘나고 못남에 관계없이 자식을 사랑한다. 본디 자식은 부모의 사랑이 가져다준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저 일상처럼 여겼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어그러졌을 때 어떤 상처가 생기는지 윤주희씨는 온 몸으로 말해주었다.

한국의 부모와의 관계를 맺으며 겪는 어려움이나 네덜란드와 다른 한국의 문화에 적응하기까지 그녀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통해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이 겪어야 할 아픔의 일부를 경험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면 얼마나 많은 부분을 헤아려야 하는지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인이지만 네덜란드의 사고를 갖고 있는 윤주희씨가 바라본 한국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가늠하지 못했던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본다는 점도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 중 하나였다.

아무에게나 쉽게 꺼내어 놓기 힘들만한 이야기이지만 솔직 담박하게 기술해놓은 것을 보면서 윤주희씨의 내면이 조금씩 치유되고 있음을 느낀다. 어머니의 나라 한국으로 돌아온 윤주희씨가 한국인으로서 남은 삶을 잘 빚어나가길 기원한다. 나를 찾지 못해 방황했던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삶이 그녀의 남은 삶에 좋은 밑거름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