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희호씨가 10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사형폐지국가 선포식'에 참석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기조연설에서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준 천부인권"이라며 사형제에 대한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민정
"저 역시 1980년 신군부에 의해서 사형 언도가 내려지고,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던 사람입니다. 당시 저는 국민의 힘과 세계 여론의 저항에 의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2004년 과거 저의 사형을 확정했던 바로 그 대법원에서 다시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불행 중에도 이러한 행운을 얻었지만, 저와 저의 가족이 겪은 고통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이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가'로 들어선 것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10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사형폐지국가 선포식에 참석해 기조연설에서 이같이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내란 음모 혐의를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당시 공범으로 몰려 공동 피고인이었던 한승헌 변호사도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이 날 행사는 지난 1997년 12월 23명의 사형수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 이후 단 한 번도 사형집행이 없었던 점을 들어 한국이 사실상 '사형 폐지 국가'임을 알리는 자리였다. 김 전 대통령 집권시기 부터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이 사형폐지국가임을 선포하는 뜻깊은 자리에 치사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97년 12월 대량 사형집행을 실시한 이후, 저와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10년간 단 한 차례도 사형집행을 찬성하지 않았다"며 "두 정부는 신념으로 사형집행을 찬성하지 않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물러날 무렵 사형 확정자 52명을 전원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자 추진했다"며 "하지만 관계 당국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임 중 3명만 감형하는데 그쳤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사형제로 많은 무고한 생명 말살했다"김 전 대통령은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준 천부인권"이라며 "생명의 존엄성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윤리적 입장에서 지상의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사람의 생명을 우리는 함부로 말살할 수 없다"고 분명한 사형제 폐지 입장을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사형은 흉악범을 이 세상에서 말살함으로써 범죄를 근절하거나 대폭 감소시키겠다는 취지로 행한 것이지만, 사형을 아무리 집행해도 범죄는 줄지 않고 오히려 증가했다"고 말했다.
또한 "인간의 오판이나 독재적 권력에 의해 무고한 생명을 말살시킨 경우가 많다"며 자신을 비롯해 얼마 전 무죄 판결을 받아낸 인혁당 사건 등을 예로 들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미 세계 131개 국가가 법적으로 사형제를 폐지하거나,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며 "한국도 국회의원 175명이 사형제 폐지에 찬성하고 관련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제 한국도 전 세계와 같이 사형제를 폐지할 역사적 시점에 도달했다"고 역설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부인 이희호씨, 지관 스님(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권오성 목사, 마틴 맥퍼슨 국제앰네스티 국제법률기구 국장,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 등이 참석했다. 또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사형 선고를 받았던 유인태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날 행사의 시작을 알리면서 상영된 짧은 영상물에는 김 전 대통령이 재소자 복장으로 재판장에 앉아있는 흑백 사진이 포함돼 있었다.
사회를 맡은 원종배 아나운서는 김 전 대통령을 소개하면서 "긴 방미 일정에서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꼭 이 자리만큼은 참석하셔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안다"며 참석 배경을 밝혔다.
사형폐지국가 선포식 준비위원회는 이날 선포문을 통해 "한국이 사형 집행에 유예 정책을 펴온 지 10년이 됐고, '사실상 사형폐지 국가'가 됐음을 온 국민과 국제사회에 선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어 "한국이 유엔 인권이사회의 이사국으로서, 국제 사회의 흐름에 동의하고 유엔 총회에서 채택하는 '사형제도 폐지 글로벌 모라토리엄 결의안'에 적극 찬성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