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당신의 여유가 멋집니다

[서강훈의 청춘만화 1] 할아버지께 자리를 양보받다

등록 2007.10.13 09:39수정 2007.10.1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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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스물 셋. 군대 다녀온 지 이제 두 달이 지났다. 이런 사실을 이야기할 때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같다. "혈기왕성한 나이로구나. 거기다 군대 갔다 온 지도 얼마 안 되었고."

그러나 스스로 그다지 실감하지는 못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주로 타성에 젖은 젊음을 변호하는데 자주 쓰고 있다. "병장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사회에 나와서도 '빠지게' 되었다." 이 말로 군대에 다녀와서 무언가 달라졌을 내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림없다는 것을 보여주곤 한다.  

 

그렇다곤 해도 지하철을 탔을 때 나이 지긋하신 분들을 보면 괜히 엉덩이가 근질근질한 나이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되도록 자리양보를 잘 하던 터였다.

 

그런데 오늘 만큼은 자리양보를 하긴커녕, 자리양보를 받고 싶은 날이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전단지 붙이기 아르바이트로 인해 온 몸이 피로했기 때문이다. 축축 늘어진 몸을 겨우 추슬러, 한참 지나서야 도착한 전동차에 오를 수 있었다. 

 

한가한 오후 다행히 지하철 안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 당연히 나 하나 앉을 자리가 있겠지 싶어 찬찬히 객차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서있는 사람만 없다 뿐이지 자리는 웬만큼 다 차있는 게 아닌가. 저 멀리 자리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 공간이라는 것이, 씨름선수 같이 체구가 훌륭하신 남자 분들 사이에 있었으므로 비집고 들어가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너무 피곤했던지라 절망에 빠진 나는, 실망한 표정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힘없이 문 바로 옆에 난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어이 학생! 여기 앉지."

"예?"

 

어떤 노신사께서 내게 너무도 친근한 목소리로 당신의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는 내게 사양할 틈도 주지 않고 벌떡 일어나 걸어가셨다. 무언가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라 여겨선지, 양보받은 자리에 앉기는 했는데 시선은 계속 할아버지를 따라가고 있었다.

 

'혹시 다음에 내리려고 저러시나? 그렇겠지. 설마 일부러 저러실까?'

 

그런데 할아버지는 부지런히 걷고 걸어, 텅 비어있는 노약자・장애인석에 가서 사뿐 앉으시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무언가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너무도 감사한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는 너무도 환한 미소와 더불어, 나를 향해 손까지 흔들어 주셨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고개를 숙이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간 어르신들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리를 양보한 적은 많았지만, 이렇듯 유쾌하게 자리 양보를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할아버지의 자리 양보는 그 자체로 내게 너무나 큰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스스로 나이가 그리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제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TV에 나와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으니 그리 적은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군대에 있을 때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후임병들이 나보다 전부 어린 형편이었으니. 그곳에서 지냈을 당시를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나이와 계급이라는 권위로 아랫사람들에게 군림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반성하게 된다. 

 

낮은 자리에서 위를 쳐다보면 권위주의에 빠져있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 싫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 모습 그대로 살고 있었나 보다. 할아버지의 양보로 인해 스스로를 덤덤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언젠가는 나의 젊음도 끝나고 나이가 들 것이다. 그것이 필연이라면 가끔은 젊은 사람에게 '멋진 양보'를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으로 늙고 싶다고 생각했다. 

2007.10.13 09:39ⓒ 2007 OhmyNews
#청춘만화 #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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