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용서하기 위하여... '용서의 고개'를 넘다

[천진난만하게JH, 산티아고 가는 길 8] 팜플로나에서 오바노스까지

등록 2007.11.17 16:37수정 2007.11.2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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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아름다운 뒷모습. 부자, 모녀가 함께 걷는 이들이 많았다. ⓒ JH



주님, 누가 주님 천막에 머물 수 있으리이까?
그는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놓지 않으며, 무죄한 이에게 해되는 뇌물을 받지 않노라. 이를 실행하는 이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 - 시편 15장 1, 5절


2007년 6월 26일 화요일,
순례 4일째, 총 22km.
6시 50분 출발, 오후 1시 반 도착.


6시쯤 깨서 준비하고, 숙소의 아침을 먹으러 나섰다. 2유로를 내고 받은 아침은 반들반들하게 당이 발린 크로와상 류의 빵과 빈 찻잔, 대체 이걸로 어떻게 아침이 되지?! 한숨을 내쉬는 사이 숙소 아주머니가 들고 오시는 커피와 우유 주전자가 보였다. 쓰기만 한 커피를 즐기지 않는 나는 아주머니가 커피주전자를 그의 찻잔에 부으시려 하자 발버둥을 치며 '우유만 주세요'하고 말했고, 꺼림칙한 표정의 아주머니는 찻잔에 우유를 한 가득 부어주고 가셨다. 나는 뜨거운 우유가 담긴 찻잔에 한국에서 준비해간 비상식량, 미숫가루를 섞어 '미수 콘 레체(미수 탄 우유)'를 만들어버렸다. 아직은 낯선 대륙식 아침식사였다.

숙소를 빠져나와 걷기 시작하자 전혀 다른 팜플로나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어제 도착한 후 둘러본 곳은 팜플로나라는 꽤 큰 도시에서도 '올드 타운(구 도시)'이라고 할 만한, 과거의 건물과 흔적들이 남은 일종의 관광객 혹은 순례자를 겨냥한 지역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이다. 구 시가지를 조금만 벗어나도 높다란 건물, 잘 깔린 도로, 쌩쌩 달리는 차들과 버스, 바쁜 걸음을 하는 도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곳들도 있었다니!'하며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걷는 가운데 만난 공원들은 초록 잔디가 양탄자마냥 보드랍게 깔려 있었고, 스프링클러가 열심히 돌아가며 잔디에 물을 주고 있었다. 잘 닦인 순례의 길에는 빨간 점퍼를 맞춰 입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길을 걷다 멈추어 아들이 아버지의 배낭에서 책을 꺼내주었고, 아들이 겉옷을 벗는 동안 아버지는 옆에서 기다려주었다. 갑자기, 어제 떠들썩한 저녁식사를 함께했던 스페인 모녀 순례자들이 떠올랐다. 방금 공중전화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마친 내 눈에는 참 좋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한국산 볶음고추장을 둔 실랑이


길은 나바라 대학교를 지나 금세 팜플로나를 빠져나왔고, 고속도로와 이어져 '시주르 메노르(Cizur Menor)'라는 작은 마을에 닿았다. 한국에서 이 마을의 숙소가 참 좋다는 평을 듣고 한 번 묵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부지런히 발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길은 곧 밀밭 사이로 이어졌고, 그 길에서 한국인 모녀 순례자들을 다시 만났다.

"학생! 잘 만났네. 어제 식사는 잘 했어? 숙소에서 기다렸는데 안 오길래 걱정했지."
"네. 저희 숙소가 10시면 문을 닫아서 시간이 안 되어서요."
"그렇지 않아도 고추장 지금 갖고 있는데, 가져갈래?"


퍽 버거워 보이는 가방(에는 캐리어처럼 바닥에 끌 수 있는 바퀴까지 있었다)을 내려 물건을 꺼내려던 것을 막아서며 나는 말했다.

"지금 여기서는 좀 힘들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고추장 있긴 하거든요."

밀밭 한가운데에서 볶음고추장을 꺼내기 위해 짐 가방을 헤치는 것은 버거운 일로 보였다. 별 말이 없던 딸도 '지금은 좀 그래요'라며 어머니를 막아 세웠고, 우리는 잠시 스페인 밀밭 한 가운데에서 한국산 볶음고추장을 둔 실랑이(?)를 벌이다 곧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머님과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오르막을 올랐다. 그리고 어머님은 이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가톨릭엔 세 개의 성지가 있어. 한 군데가 여기, 산티아고 가는 길이고 나머지는 로마, 그리고 예루살렘이지. 공식적으로 교회에서도 이 길을 걷고 나면 자기가 살면서 지었던 죄를 감면해준다고 해. 물론 꼭 그것 때문에 걷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얘기도 알고 있으면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지 않겠어?"

내가 갓 세례를 받았다고 하니 어머님께서도 경험을 들려주신다. 본인께서도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가톨릭 학생단체에서 활동하시고 직접 찾아다니며 세례를 받으셨다고, 가톨릭이 참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어머님을 이 길 위에 서게 한 이야기가 내 것과 참 닮아있어 그저 말을 거두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지나간 날의 어리기만 한 나를 생각의 골방에 가둔 채, 그 애를 놓아주지 못하고 괴롭게 악을 쓰고 화를 내며 '왜 그럴 수밖에 없었냐'고,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살았냐'고 소리를 지르는 지금의 나, 용서할 수 없었던 또 다른 나를 끌어안을 수 있다면, 우리가 그럴 수 있다면….

메마른 평원을 지나 눈앞에 쉬기에 알맞은 그늘이 나타났다. 그곳에 길을 멈추고 서 있는 순례자가 있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딸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야겠어. 학생 먼저 가."

천 년 전 이 길을 걸었을 것 같은 철 순례자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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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고개를 따라 길은 이어진다. Alto de Perdon가는 길. ⓒ JH



나는 그들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Alto de Perdon(용서의 고개)'를 향했다. 피레네에는 비할 바 못되지만 언제나 오르막은 힘겨운 걸음이다. 바람이 거센 산등성이엔 날렵한 현대식 풍차들이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고, 초원은 금빛 머리칼을 열심히 빗어 넘기고 있었다.

고개에 도착하자 마치 천 년 전 이 길을 걸었을 법한 순례자의 행렬이 철제 조형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걷는 이, 말을 탄 이, 그들은 키보다도 더 큰 십자가를 양 손에 붙들고 있었다. 다하지 못한 걸음을 이 언덕 위에서 멈춘 채인 그들은 매일 이 언덕을 향해 오는 순례자들에게 멋진 친구가 되어준다. 나 역시도 철 순례마 한 마리와 사진 한 장을 남겼다.

곧 눈앞에 급한 내리막이 펼쳐졌다. 자갈밭 길은 발 디딜 곳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오늘 하루도 어느새 걸음을 마쳐야 할 때다. 애초 목적지는 고대 다리로 유명한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그러나 지쳐버린 몸과 3일 내내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숙소가 지겨워져서 앞으로 나타나는 첫 번 사설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숙소는 눈 깜짝 할 새에 나타났고, 파라솔이 쳐진 야외에는 이미 도착한 순례자들이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고 쉬고 있었다. 그리고 숙소 앞 길가에는 검은 고양이가 느릿느릿 걸음하고 있었다. 주먹보다도 작은 어린 고양이었다. 한 걸음 내딛는 것도 힘에 겨운지, 동그랗게 만 등은 허리뼈가 움직이는 것이 보일 정도로 야위었다.

나는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 애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차마 손을 내밀어 쓰다듬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옷을 털고 일어나 다시 걷기엔 아쉬웠다.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그 애의 옆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을 돌아보며 그 작은 아이가 힘겹게 걸음하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너무 추운 여름, 긴 팔에 바람막이를 입고서 떨다

다음 마을은 '오바노스(Obanos)'다. 1시 즈음 도착한 숙소엔 달랑 3사람뿐, 거대한 홀에 2층 침대 수십 개가 있었고, 나는 창가 옆의 구석진 침대에 짐을 푼 후 기다리지도 않고 좋은 샤워시설에서 씻고 빨래하고 낮잠까지 잘 자고 일어났다.

6시 정도에 나선 동네 성당은 공사 중, 앞뜰 놀이터에선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 날은 추웠다. 너무너무 추워서, 긴 팔에 바람막이를 입고서도 햇빛을 찾아 '오돌오돌' 떨었다. 여름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딱히 제대로 먹은 게 없어 저녁식사가 급했다. 동네를 몇 바퀴 돌아 식당으로 보이는 곳을 두어 곳 발견했지만 그나마 굳게 닫힌 채였다. 역시나, 밥 먹는 시간에만 문을 연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여기를 갈까, 저기를 갈까 이리저리 고민하던 끝에 '산 미구엘' 맥주광고 간판이 걸린 작은 바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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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드세요! 우유, 페스츄리 빵. 한국이 그리워지는 시간. ⓒ JH



겉으로 보기엔 대체 여기서 무슨 음식이 나올까 의심스러웠던 그 작은 바. 대여섯 개의 테이블이 있고,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원두를 갈아 '카페(Cafe·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한켠에는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두 여자가 나란히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고, 주인 아주머니는 갓 내린 카페 두 잔을 그녀들에게 내밀었다.

"메뉴 먹을 수 있나요?"
"지금은 안 돼. 이따가 8시에 와."


얼렁뚱땅 쫓겨난 후 다시 동네를 배회했지만, 이곳은 어딘가에서 1시간을 보내기엔 너무나 작은 곳이었다. 나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다.

"저 여기서 밥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안돼요?"
"뭐 그러든지."
"그럼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우유 탄 커피)' 주세요."


그리고 책을 뒤적거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모녀지간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찾아가 '여기 앉아도 되나요?'라고 물었다. 이 동네에 산다는 나와 동갑의 여자친구, 한담을 조금 나누다가 내일의 목적지가 될 '에스테야(Estella)'에 가면 맛볼 수 있는 요리를 물어보았더니 넌지시 하나를 노트에 적어준다. 그녀들은 집으로 가고, 나는 여전히 남아 밥을 기다리는 사이, 바의 문이 열리고 한 눈에 보기에도 순례자가 분명한 이들이 들어왔다.

"어, 너희도 여기서 밥 먹으러 왔니?"
"응."
"괜찮으면 같이 식사해도 될까?"


'물론이지. 우린 다양성을 존중하니까!'라며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페인어 불능상태인 내가 메뉴를 제대로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벨기에인 나탈리, 덴마크인 브리짓, 그리고 아이슬란드에서 온 부부 넷과 함께 앉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메뉴를 읊으면 스페인어를 약간 할 수 있는 브리짓이 나머지들에게 열심히 영어로 통역을 해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주문을 마치자 아주머니는 "아구아, 비노?(물이냐 와인이냐)"를 마지막으로 물어왔다. 나는 서슴지 않고 '비노!'를 외쳤고, 옆에 있던 이가 갑자기 내게 말한다. '너 어제 핀초스 바에서 과음하던데~', 나를 기억하나 보다. 그는 이 자리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아시아인이라서 퍽 눈에 띄나 보다.

우리는 왁자지껄하게 얘기하고, 밥을 먹고, 서로 좋은 순례를 기원하며 헤어졌다. 그 날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침대 위에 노트를 펼쳐 이렇게 끄적였다.

'the Blessed way to Santiago.'(산티아고 가는 길에 축복을)

이 길을 끝내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나는 완전하게 이 길과 사랑에 빠졌다! 비록 발목은 계속 시큰거리고 내리막길에서는 종아리가 당기고 그렇지만, 수십 명의 순례자들과 한 방을 쓰고, 웬 남자가 훌러덩 옷을 갈아입는 것을 봐야 하는 길이지만-,

그래서 좋다. 무엇을 하든, 어떻게 있든, 내가… 어찌되든 간에 그저 나인 채로 받아들여주는 이 길.

걷기 시작하고, 4일째의 밤이 흐르고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자 #팜플로나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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