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승화된, 간절하고 슬픈 비원

백제 유민이 세운 절 충남 연기군 운주산 비암사

등록 2007.12.02 13:19수정 2007.12.02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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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절 마당을 지키는 느티나무.

절 마당을 지키는 느티나무. ⓒ 안병기


역사를 잃으면 전설과 풍문이 난무한다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 마을 소들은 한가하게 "음메"를 연발하고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김장하느라 바쁘다. 마을 사이로 난 고갯길을 넘어간다. 비암사는 되되하다. 쉽사리 제 얼굴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외따로 떨어진 집 한 채를 지나고 운주산 기슭에 더 바짝 다가갔을 때에야 비로소 비암사는 결가부좌를 풀고 나그네를 마중나온다.


문득 우측 산기슭을 바라보니, 부도 2기가 있다. 앞의 것은 일제시대 때 조성한 것이고, 뒤의 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한 석종형 부도다. 약간의 변형과 장식이 있긴 하지만 매우 소박하고 아담하다. 마침내 비암사로 올라가는 돌계단 앞에 이르렀다. 계단 꼭대기에는 수령 몇 백 년은 됐을 법한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마치 금강문을 지키는 나라얀금강 같다. 코끼리보다 백 만 배나 힘이 세다던가.

느티나무와 눈인사를 나누고 절 마당으로 들어서면 비암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생각보다 큰 절이다. 이 절은 언제 창건되었을까. 기록이 사라지고 역사를 잃으면, 전설과 풍문이 대신 나서서 설치게 된다. 이 절은 백제의 부흥을 기원하던 백제 유민들이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a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극락보전과 제119호 삼층석탑.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극락보전과 제119호 삼층석탑. ⓒ 안병기


a  극락보전 안. 아미타불 왼쪽의 까맣게 보이는 것이 청주박물관으로 옮겨진 국보와 보물의 모사품이다.

극락보전 안. 아미타불 왼쪽의 까맣게 보이는 것이 청주박물관으로 옮겨진 국보와 보물의 모사품이다. ⓒ 안병기


삼층석탑과 극락보전이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다. 먼저 3층 석탑으로 다가가 이모저모 살펴본다. 어쩌면 이 탑이 없었다면 비암사라는 절은 이름없는 절이 되어 벌써 쇠락하고 말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1960년, 이 탑 꼭대기에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국보 제106호),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보물 제367호), 미륵반가사유석상(보물 제368호) 등 3개의 비상(碑像)이 발견됨으로써 비암사는 비로소 세상에 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청주국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오늘(24일)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도 10년 전에 청주박물관에서 보았던 이 3개의 비상들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다.

삼층석탑은 1층 기단 위에다 3층의 몸들을 올린 형식이다. 1982년에 복원 공사 때 없어진 기단부를 보완하고 뒤집혀 있던 석재들을 바로 잡은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기단과 몸돌의 4면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이 몸돌에 비해 둔해 보이고,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을 크게 줄이는 등 비례감이 일정치 않은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탑 뒤에 선 극락보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의 아담한 건물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의 기능을 겸하기도 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주불로는 어떤 중생이라도 지극 정성으로 부르면 아름다운 서방정토로 데려간다는 아미타불을 모셨다. 아미타불의 왼쪽에는 청주박물관으로 시집 보낸 비상들을 잊지 못했는지 모사품을 전시해두고 있다.


십 년 전, 청주박물관의 기억을 떠올리다

a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 ⓒ 안병기


a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과 미륵보살반가석상(보물 제367호와  보물 제367호).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과 미륵보살반가석상(보물 제367호와 보물 제367호). ⓒ 안병기


이 세 개의 비상은 비석 형태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형식이다. 석질은 모두 연질의 납석 종류이며 적갈색을 띠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후, 한때의 왕도였던 공주의 인근에 있는 유물을 이 절에 봉안한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먼저 국보 제106호인 삼존석상을 보면 4각의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 형태이다. 정면엔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하였다.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새기고, 그 안쪽을 한 단 낮게하고 나서 새긴 것이다.

커다란 연꽃 위의 사각형 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얼굴 부분이 갸름하다. 앉은 자세가 매우 안정돼 있다. 또 양쪽 측면에는 비파, 생황, 긴 피리, 장구, 금, 젓대, 배소 등을 연주하는 8명의 천인들이 둥둥 떠 있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비상에는 "전(全)씨들이 마음을 합쳐 아미타불과 관세음, 대세지보살상을 삼가 석불로 새긴다. 계유년 4월15일…중략…목(木) 아무개 대사 등 50여 선지식이 함께 국왕, 대신, 7세(七世 ) 부모의 영혼을 위해 절을 짓고 이 석상을 만들었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계유년은 문무왕 13년(673)이다. 이 비상의 내용에 입각해 지금도 이곳에선 해마다 4월 15일이면 괘불을 걸고 백제대제를 거행한다.

보물  제367호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己丑銘阿彌陀如來諸佛菩薩石像)은 배 모양의 돌 앞면에는 큰 연꽃 위에 앉은 본존인 아미타불을 새겼다. 엄격한 좌우대칭 수법에 따라 좌우에는 서 있는 자세의 불상들이 새겨져 있다.  아미타불의 머리 위에도 5구의 작은 부처를 새겼는데 그 위에 다시 7구의 작은 부처를 더 새겨넣었다.

삼국시대 불상 요소와 새로 들어온 당나라 요소가 혼합된 통일신라 초기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기축년이란 신라 신문왕 9년(689)일 것으로 생각된다.

보물 제368호 미륵보살반가석상은 곱돌로 만든 석상이다. 정면에는 왼발을 내리고 오른발을 왼쪽 다리에 올린 채 오른손을 뺨에 대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한 반가상이 새겨져 있다. 이 반가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목걸이와 구슬장식도 갖추고 있다. 반가상 양쪽에는 두 손에 보주를 들고 정면을 향하고 있는 보살 입상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반가상을 본존으로 삼아서 3존 형식을 취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는 보탑을 크게 새겼다. 이 보탑으로 보아서 정면의 반가상이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크게 발달한 반가사유상 양식의 아름다운 비상이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과 같은 시기인 서기 673년에 조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연기군 일대에서 백제가 멸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조성된 이 석상들은 매우 아름답다. 당시 백제의 석조미술 수준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석수는 아름다운 유물들을 탑 꼭대기에 숨길 수밖에 없었을까. 자신의 은밀한 비원을 숨기려고?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신라군이나 당나라 군사에게 강탈당할까봐?

약간 조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유물들이 얼마나 화려한 것인지를 추측하는 데는 별 부족함이 없다.

모사품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 기왕 모사품을 만들어 놓으려거든 조금 더 정밀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놓았더라면 좋았을 걸. 요즘엔 진짜 뺨치는 짝퉁이 얼마나 많은가.  차라리 실물을 크게 확대한 사진을 걸어두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a  대웅전. 왼쪽 건물은 명부전이다.

대웅전. 왼쪽 건물은 명부전이다. ⓒ 안병기


극락보전 옆에는 대웅전이 자리 잡고 있다. 절 아래에 있는  청신녀정영희여사공적비에 따르면 이 건물은 1991년에 조치원읍에 살던 정영희 여사의 시주로 지어진 불전이다.

내부를 통간으로 했으며 불단을 후면 벽까지 뒤로 물린 것이 특징이다. 예불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했던 건축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기계 대패를 사용하여 가공한 부재들은 그 표면이 지나치게 매끄럽고 반듯하다. 자연스러운 건축미를 상실했다는 점이 흠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정면 세 칸 모두 4분합문이지만 들어열개가 불가능하다. 내부를 넓게 쓰고자 통간으로 지은 뜻과 크게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a  대웅전을 기준으로 좌측에 있는 향적당.

대웅전을 기준으로 좌측에 있는 향적당. ⓒ 안병기


a  대웅전 우측에 있는 설선당.

대웅전 우측에 있는 설선당. ⓒ 안병기


극락전 앞마당 북쪽 끝에 있는 건물엔 오관료와 향적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민도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모두 세 채로 돼 있는데 건물 이름으로 보아 요사로도 쓰고, 스님들의 생활공간으로도 쓰는 곳인가 보다.

느티나무 바로 앞에서 향적당을 맞바라기 하고 있는 건물은 설선당이다. 스님들의 선방이다. 선방 오른쪽 창호에는 비상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아무래도 비암사 스님들에게 청주박물관으로 이관된 3점의 비상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인 모양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잊을 것. 과거 청산은 이 산속 스님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화두가 아닐까.

너무 늦게 와 버린 게 아닌가

a  절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산신각.

절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산신각. ⓒ 안병기


a  산신각에서 내려다 본 비암사 전경.

산신각에서 내려다 본 비암사 전경. ⓒ 안병기


대웅전 오른쪽으로 놓인 돌계단을 올라가면 산신각이 있다. 이 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전각이다. 정면과 측면이 각 1칸으로 된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린 건물이다. 전각 안에는 산신상과 호랑이상, 산신탱화를 모셨다.

산신각 뒤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절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비암사로 들어오는 길이 구불구불하다. 절이 인가로부터 얼마나 깊숙이 숨어들어왔나를 짐작할 수 있겠다. 지금은 비암사가 이런저런 전각을 다 갖추고 있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삼층석탑과 극락보전, 그리고 부도 2기만이 남아있던 조그마한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8년, 이진우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부터 불사를 시작해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와 선방, 산신각 등을 중창함으로써 오늘의 가람 형태를 이룬 것이다. 올라오면서 보니, 절 앞에 연못을 파는 등 각종 조경 공사로 어지러웠다.

'이 절에 너무 늦게 와 버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고즈넉하고 꾸밈없는 절집을 보고자 했다면 좀 더 일찍 와야 했던 것이다. 마음을 움직여서, 마음에 담아가고 싶은 절들이 점점 사라져 간다. 산신각을 내려와 하산을 서두르는 마음이 씁쓸하다. 내 사찰기행은 매번 뿌듯한 마음보다는 씁쓸한 기분을 안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것인가.
#연기군 #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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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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