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조프라 순례자 숙소 숙소의 전경
JH
안내받은 숙소는 걷기 시작하고 처음 만난 단층침대가 양편에 자리잡은 2인 1실이었다. 이층침대가 점점 겁나기 시작했던 나는 이 숙소가 아주 마음에 들어 ‘알베르게의 호텔’이라고 불렀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마당의 빨랫줄에 침낭까지 다 걸쳐놓고,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부엌이 꽤 멋들어지게 되어 있어서, 시에스타 시간 전에 상점에 들러 요것조것 샀다. 점심을 만들어 먹을 생각이었다. 한 쪽에서 면을 삶는 사이에 팬에 양파와 해바라기씨앗을 볶은 후 우유를 부어 ‘우유소스 파스타’를 만들었다. 꽤 실험적인 첫 파스타는 오묘한 맛이었고,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사왔던 빵은 마치 종이를 씹는 듯 퍽퍽한 맛이었다. 마당에 펼쳐진 파라솔에 한 상을 차려 남김없이 비웠다. 그리고 속속 도착하는 순례자들에게 ‘올라!’를 던졌다.
걷기만 하면 모든 것이 준비된 이곳에서, 나는 오늘 몇 유로를 쓰지도 않고 호텔보다 편한 잠자리, 맛있는 점심, 그리고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스페인의 태양이 살갗을 새카맣게 태우고 나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어젯밤 설친 잠에 꾸벅꾸벅 졸다, 걷다 만나는 사람들, 나누는 이야기, 분명 어설픈 한국식 영어를 쓰고 있을 나인데 그래도 듣겠다고 들어주겠다고 귀를 기울여주고 천천히 한 마디씩 얘기해주며 응원해주고 껴안아주고…, 고맙기만 하다.
욱신거리는 발목을 마당의 연못에 담그기도 하고, 오래간만에 숙소에 있는 인터넷을 통해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지난 10여일의 순례를 일기장에 정리했다. 점점 할 일이 떨어지고 나른해지는 가운데 문득 마을 안내 표지판에서 이 동네에 식물원이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갈까, 말까?
숙소에 놓인 방명록을 들춰보다 한국어로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식물원에서 장미 향기를 맡으며 순례의 피로를 풀어보시길’이라는 기록을 읽었다. 향기로운 장미의 내음…! 이 매혹적인 구절에 결심했다. 언제 또 이곳에 올 수 있을지 모르니, 한 번 가 보자고. 1.5km라면 먼 거리는 아니니 그냥 지금 신고 있는 슬리퍼를 끌고 다녀와도 좋겠지? 별 생각 없이 가벼운 옆가방을 메고 길을 나섰다. 마치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동네 마실 나가듯이.
시계는 5시 전후, 도착하면 시에스타 시간이 끝날 것이란 예상으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검은 아스팔트길을 따라 걸었다. 웬 허름한 천막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집시들일까? 그리고 양편으로는 끝없는 밀밭! 햇빛은 걸을 때보다 훨씬 더 사납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가까울 줄 알았던 식물원은 나타날 생각을 않고, 등 뒤로 따끔거리는 햇빛은 이러다가 길바닥에 눌어붙어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발바닥이 이상했다. 식물원은 나타날 낌새가 없고, 모든 결심이 후회가 되어 몰려오기 시작했다. 따끔거리는 발바닥을 끌고 겨우 도착한 식물원은…, 뒤통수를 후려갈길 정도의 것이었다.

▲리오하 식물원 작지만 아름다운 식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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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리오하 지방의 유일한 식물원이라는 이 작은 밭(!)에는 갖가지 나무와 꽃, 수상생물 등이 아기자기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햇빛에 지치고 물집에 질려버린 내게는 ‘대체 뭘 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야?!’일 뿐이었다. 5유로를 입장료로 내고 겨우겨우 구경을 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장미밭은 정말 아름답고, 또 향기로웠다. 프랑스 아비뇽의 시낭크 대수도원에서 보기를 기대했던 라벤더도 볼 수 있었다. 아아, 그렇지만… 나는 이미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다.

▲리오하 식물원 내부 고요한 정원을 거닐며
JH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숙소로 향하는 길은 햇빛을 맞대고 걸어야 했다. 물집을 만든 신발과 나의 쓸데없는 모험심에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결국 몇 분 걷지 못하고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걸었다. 새카만 아스팔트는 잔뜩 달아올라 물집 잡힌 부분을 지지는 듯했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세 사람의 동네 아주머니를 졸졸 뒤따라 걸었다. 그리고 뒤에서 맹렬히 따라오는 밀 수확 차를 옆길로 피하며 차에서 흘러나온 밀 껍데기가 풀풀 날리는 길 위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멍한 채로 걸음을 계속했다.
겨우 도착한 숙소에서 발을 씻고 들여다보니 여전히 아스팔트가 거뭇거뭇한 발바닥에 500원짜리 동전만한 물집이 잡혔다. 장미향기와 맞바꾼 영광의 상처였다. 급히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을 터뜨렸다. 책으로만 읽고 얘기로만 들었던 물집 터뜨리기를 해 본다고 좋아하면서도 내일 걸을 일이 걱정되었다. 한 걸음만 내딛어도 불붙듯이 타는 것만 같았다.
문득 ‘생장에서 다시 태어나 시작되는 하루하루의 순례는 너의 과거와 맞물린다’고 말했던 피터가 떠올랐다. 오늘로서 10일째, 199km. 그리고 얻게 된 물집, 과연 어떤 의미일까. 머릿속은 나의 어린 시절을 더듬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것이 퍽 답답한 밤이었다. 순례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집에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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