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시작, 오아시스에서 만난 순례자들

[천진난만하게JH, 산티아고 가는 길 19] 부르고스에서 오닐로스 델 카미노까지

등록 2007.12.10 10:49수정 2007.12.1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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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6일 금요일, 날씨 미친 듯이 맑음, 순례 14일째, 21km.
오전 7시 30분 출발, 오후 2시 도착.

 

아침도 못 먹고 급히 빠져나온 부르고스, 숙소에서 대성당 뒤편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대성당의 깨진 창문, 나치 문양, 온갖 알아들을 수 없는 글자의 괴기스러운 낙서들, 컴컴한 메탈음악 바 같은 풍경들이 나를 잔뜩 움츠러들게 했다. 발뒤꿈치가 시큰거려 걷다 말고 신발에 양말까지 벗고 밴드를 꺼내 붙여야 했다. 그것마저도 누가 뒤에서 나를 칠까 바들바들 떨었다. 출발이 좋지 않다.

 

잔뜩 겁을 먹은 가운데 관통해야 했던 공원에서는 잔디밭 위에 누군가 잠든 침낭 하나(!)와 허리가 구부정한 노숙자 같은 사람을 보았다. 왠지 저 사람이 내 쪽으로 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걸음이 급해진다. 황급히 길을 따라가니 눈앞에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이가 보인다. 쓰라린 발뒤꿈치를 잊은 채 걷고 또 걸었다. 30미터, 20미터, 10미터, 그리고.

 

“안녕! 좋은 아침이야.”

 

불안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나를 쫓던, 혹은 쫓는다고 생각하던 이가 등 뒤에서 멀어져간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여기 좀 이상한 것 같아. 공원 입구에선 침낭 속에서 자는 사람이 있고, 웬 노숙자가 뒤쫓지 않나….”

 

그녀도 편한 마음은 아니었는지 우리는 곧 일행이 되어 공원을 걸어갔다. 눈앞에 이 무서운 공원의 말미가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 건장한 체격의 배낭을 등에 진 순례자와 노인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그 노인을 보자마자 방금 본 노숙자가 연상되어 다시 걸음이 빨라졌다. 함께 걷던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몇 발자국 떨어져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할아버지가 여기에 순례자들이 꼭 가 봐야 하는 곳이 있다고 함께 가자는데, 같이 갈래?”
“어… 고맙지만 난 갈게.”

 

나는 서두르듯 발길을 돌렸고, 여자 역시 마찬가지로 가지 않기로 결정했는지 우리는 다시 걸어 공원을 빠져나와 큰 길로 들어섰다. 나는 물었다.

 

“저 할아버지, 거짓말하는 거 아닐까?”
“글쎄, 잘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길 위에 그런 사람들이 있단 얘긴 들었어.”
“돈이라도 원하는 걸까?”
“모르지. 여하튼 난 별로 내키지 않았어.”

 

대로를 질주하는 차들과 밝은 빛에 겨우 안심이 되어 그제야 통성명을 나눴다. 브라질에서 온 일레나는 알고 보니 며칠 전 나와 함께 걸었던 브라질 순례자 줄리아나와 함께 출발한 친구 사이였다. "나도 알아! 우리 만났는데!" 하며 반색을 했다.

 

“나는 몸이 좀 안 좋아서 서로 일정이 빗나갔어. 그 애가 아마 더 앞에 가 있을 거야. 폴란드 아저씨 피터와 함께 걷고 싶어서 조금 무리하고 있나 봐.”
“그렇구나! 줄리아나가 갖고 있던 지팡이 지금도 기억나. 그 덕분에 내 지팡이에도 이렇게 이름을 새겼지!”
“나도 내가 살고 있는 브라질의 숲에서 나무를 구해 깎고 다듬으면서 지팡이를 준비했어. 여기 이렇게 이름도 새겼지. 한 번 들어 볼래?”

 

받아든 그녀의 것은 묵직하나 무게감이 느껴졌다. 부담스럽진 않냐 물으니 함께 걷는 동안 내게 고향의 힘을 전해줘서 좋아한단다. 줄리아나와 일레나의 지팡이, 그리고 프랑스 친구 마리엘의 바닷가에서 온 조개… 그들은 이렇게 순례를 자기들의 의미로 풍성히 꾸려가고 있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지나친 동상 앞에서 그녀가 오랜 시간 멈춰서 있다. 워낙 많은 조형물들을 지나쳐왔던 터라 이번에도 별 것 아닌 줄 알고 넘어가려 했는데 뭔가 의미가 있는 걸까? 관습적으로 예수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곱슬 단발머리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을 가진 순례자가 조개달린 망토를 걸친 채 지팡이를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발치에는 비노가 담겨 있을 법한 호리병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자를 뜻하는 상징물들이다.

 

“이 아래에 글귀가 쓰여 있어.” 일레나는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천천히 영어로 읽기 시작한다.

 

a 부르고스를 빠져나오며 순례자상에 새겨진 문구를 응시하며

부르고스를 빠져나오며 순례자상에 새겨진 문구를 응시하며 ⓒ JH

▲ 부르고스를 빠져나오며 순례자상에 새겨진 문구를 응시하며 ⓒ JH
 

“산티아고로 향하는 여정이 끝나는 날, 그대는 낮 가운데에 하늘에서 별들을 보게 될 것이며 그 인생은 새롭게 열릴 것이다….”

 

우리는 잠시 말을 거두었다. 그리고 동상 앞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걷기 시작했다. 곧 동상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예수상일까, 산티아고 성인일까 추측하기도 하고 정말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한 낮에 별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너는 어떻게 순례를 결정하게 되었어?”
“나? 항상 언젠가는 이 길에 오를 것이라는 마음이 있었어. 그러던 가운데 브라질에서 먼저 이 길을 다녀온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모임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거든. 힘든 시간을 이겨낼 힘을 길 위에서 얻어왔다는 말에, 지금이 바로 내가 떠날 시간이라고 느꼈지. 결정하고 나니까 막상 준비는 얼마 걸리지 않았어. 복잡한 일들이 모두 풀리면서 마치 지금 걸으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야.”
“나도 처음엔 다른 여행을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이 길에 엮이고 나니 준비하는 것은 단 한 달도 걸리지 않았어.”
“정말 신비하지. 아시아에서 온 젊은 여성인 너는 어떻게 이 길을 걷게 되었니?”

 

길을 걷기 시작한 첫 날부터 수없이 들었던, 그리고 물었던 질문, ‘왜?’ 였다. 처음에는 갓 세례를 받고 여행을 준비하다 알게 된 이 길을 걷고 싶었다고 간단하게 말했다. 각국의 사람들과 만나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왔다고도 말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기만 했다. 설익은 이유들을 이리저리 갖다 붙여도, 썩 만족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나? 지금 생각하면…. 그저 그 분이 부르셨구나, 싶어.”

 

일레나는 며칠 전부터 복통이 심해져 의사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며 진료소를 찾는 것이 급해 조금 먼저 걷겠다고 했다. “몸 조심해.” 인사를 건네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이야기에 빠져 중간에 있다는 마을 하나를 지나쳐 버렸는지 두 시간 반 정도를 걷고 작은 마을 '타르다호스(Tardajos)'에 닿았다. 아침도 먹지 않고 걷기 시작한지라 슬슬 배가 고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담벼락에 가방이며 지팡이들이 기대어 있는 바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노천 테이블에 짐을 내려놓고 동전 몇 개를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부연 담배연기, 술잔을 기울이는 초로의 할아버지들, 축구경기 뉴스로 시끄러운 TV소리를 뚫고 고심 끝에 샌드위치처럼 생긴 '보카디요(Bocadillo)' 한 조각과 카페 콘 레체 큰 컵 한 잔을 주문했다. 조심조심 두 개의 접시를 들고 바깥 테이블에 놓았다. 성호를 긋고 한 입 베어 문 보카디요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맛으로 남아 있다.

 

a 타르다호스에서 메세타 황야를 앞두고 순례자들과 맞은 달콤한 아침식사

타르다호스에서 메세타 황야를 앞두고 순례자들과 맞은 달콤한 아침식사 ⓒ JH

▲ 타르다호스에서 메세타 황야를 앞두고 순례자들과 맞은 달콤한 아침식사 ⓒ JH

 

식사에 집중하는 사이 속속 순례자들이 도착한다. 자세히 보니 얼굴들이 낯익다. 지난 밤 숙소를 같이 썼던 이들이 많았다. "올라(안녕).", 그리고 몇 되지 않는 테이블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합석하며 각자 언제, 어디서 출발했고 오늘은 어디로 갈 것인지 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마치 서로의 생년월일과 고향을 물으며 친해지는 것과 아주 닮았다. 길 위에 오른 날이 바로 우리들의 생일, 그리고 시작한 마을이 고향이었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메세타야. 이 구간은 카미노에서도 유명한 깡촌 동네지. 영어가 통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곳이니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걸!”
“각오고 자시고 우선은 카페 콘 레체 한 잔이 더 급해~”

 

방금 도착한 순례자가 외치듯 가방을 던져놓고 바로 향한다. 서구 아이들은 아침시간 빈 속에 커피 한 잔으로 정신을 깨는가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말이다. 어두컴컴한 새벽 숙소의 식당에 들어가면 작은 주전자에 물을 끓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보통 커피에 부을 물을 끓이는 모습이었다.

 

로그로뇨의 숙소에서 이른 아침밥을 한다, 국을 끓인다, 샐러드를 만든다며 뻑적지근하게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우리들이 가스스토브를 거의 독점하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커피 물 끓일 것만 있으면 돼’ 하며 작은 냄비를 안치던 사람들. 저러다가 속들 버리는 것 아닌가? 그러나 어느새 나 역시 아침을 (조금은 순한) 카페 콘 레체로 맞이하고 있었다.

 

진작에 보카디요며 카페를 비웠지만 엉덩이를 떼는 것이 힘겨웠다. 전날 무리했던 탓인지, 이 작은 시골동네의 바에서 풍기는 순례자들 사이의 유대감이 나를 계속 이 곳에 머무르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을 그 곳에서 글을 쓰며 도착하는 순례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멍한 채로 앉아 있었다. 그런 가운데 레데실라에서 제대로 인사도 전하지 못하고 헤어진 프랑스에서 온 마리엘의 일행을 만났다.

 

“오래간만이야!”
“응. 나 어제 너 부르고스 숙소에서 봤는데.”
“진짜? 우리 같이 묵었던 거야? 난 왜 널 못 봤지? 아마 내가 어제 너무 오래 걸어서, 제정신이 아니라 그랬나봐.”
“응. 그럴 수도 있지. 우리도 오늘은 좀 늦게 출발했어.”

 

뒤편에 그녀의 친구도 보인다. 훤칠한 키에 금발 곱슬머리가 신기한 청년, 어깨춤에 매달고 있는 찌그러진 빨간 수통이 퍽 그럴싸해 보였다. 그동안 오랜 걸음을 이어온 여행자임을 증명하는 듯한 것이었다.

 

“그 물통 되게 멋있다!”
“그래? 사실 뚜껑을 잃어버려서 신발 끈이라도 묶을 땐 물이 줄줄 새. 하하하! 그렇다고 새 걸 살 돈도 없고. 그래서 비노 병에서 코르크마개를 하나 구해서 이렇게 꽂아 넣고 다녀.”

 

뚜껑 잃어버린 잔뜩 찌그러진 수통을 매달고 다니며 유쾌한 걸음을 할 수 있는 곳, 달랑 두 벌의 옷을 매일 빨아 입으며 길바닥에 앉아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겨우 얼굴을 익힌 사이에도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한바탕 웃는 사람들이 있는 곳, 있지도 않은 눈치에 짓눌릴 필요가 없는 곳…, 이 길은 그런 곳이다.

 

한 떼의 순례자가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있을 무렵, 옆 테이블에 앉아 처음 보는 요리가 담긴 음식을 즐기고 있는 순례자를 보았다. 젊은 아시아 여성이었다. 대책 없이 뛰어 들어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비좁은 탁자 사이를 “잠깐만요”로 헤쳐 나가며 그녀에게 다가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넸다.

 

정은 언니는 나보다 한 살 많은 학생으로 일주일만에 만나는 한국인이었다.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입이 꽤 간지러웠는지 나 혼자 잔뜩 수다를 늘어놓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함께 걷게 되었다. 한 시간 반을 푹 쉬고 다시 길에 나선다.

 

a 메세타는 이런 느낌? 이틀 후 만나게 될 스페인의 평균고도 800m의 메세타 고원지대 풍경

메세타는 이런 느낌? 이틀 후 만나게 될 스페인의 평균고도 800m의 메세타 고원지대 풍경 ⓒ JH

▲ 메세타는 이런 느낌? 이틀 후 만나게 될 스페인의 평균고도 800m의 메세타 고원지대 풍경 ⓒ JH

달콤한 휴식 후의 걸음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메세타의 작열하는 태양에 선크림 바르는 것을 잊은 팔뚝은 벌겋게 익어버렸다. 내 발목에도 염증이란 게 생기려는지 욱신거림은 갈수록 심해진다. 거짓말같이 푸른 하늘과 밀밭, ‘한 조각 구름’이 뭔지 알 듯한 정말 한 점 뿐인 구름, 태양은 정말 잔인했고 내일부터는 어떻게든 정오 안에 숙소에 들어오겠다고 다짐하는 날이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이야기가 통하는 짝과도 침묵하며 그저 걷기만 했다.

 

기어코 도착한 숙소는 거친 벽돌이 그대로 드러난 돌집이었다. 곧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온도를 맞추기 난감한 물로 샤워를 하고 빨래를 널고 나니 후련하다. 길에 오른 후 매일같이 하루 한 장 가족들에게 엽서를 썼다. 어제는 너무 늦게 도착해 뭔가를 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잠들었기 때문에 침대에 엎드려 밀린 엽서를 쓴다. ‘사랑하는 가족들께’로 시작하는 작은 엽서, 한국에서는 말하지 못했던 것들….

 

대충 정신을 차리고 휘비적거리며 맞은편 침대에 자리를 잡은 정은 언니에게 다가갔다. 언니의 침대 위에 놓인 짐들 가운데 검은 표지의 책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영문 성경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언니는 1년짜리 세계 일주 항공권으로 여행 중인 장기여행자였다. 이 길이 끝나고 나서는 봉사활동을 계획 중이라고 했다. 유럽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미국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여행을 준비하며 세계 일주 항공권에 대한 정보를 들었지만 그저 언젠가 한 번 도전해 볼 만한 것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바로 그 항공권을 가지고 세계를 누비는 여행자와 함께 있다니!

 

언니는 부엌에서 이것저것을 가지고 요리를 한다. 같이 먹자고 권하셨지만 왠지 음식을 해 먹는 것이 퍽 귀찮았다. 언니가 해 주신다고 했음에도 오기로 끝까지 버티고 저녁시간을 기다렸다. 지난 밤 부르고스에서 먹었던 탄 닭요리가 아직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아 오늘만큼은 제대로 된 메뉴를 먹을 것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저녁을 기다리다 지쳐 식당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에 이끌리듯 기어갔다. 언니와 몇몇 순례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권하는 음식을 저녁에 먹을 성찬을 떠올리며 열심히 참았고, 그때 옆에 앉은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순례자들이 언니에게 물었다.

 

“혹시 네가 에디트 슈타인이니?”
“아니. 나는 아닌데.”
“우리가 도착하는 숙소에서 방명록을 보면 다른 나라 말로 쓰여진 글 아래에 항상 'Edith Stein'이라고 이름이 쓰여 있었어. 그래서 우리는 항상 궁금했지. 에디트 슈타인은 이미 반백년 전에 돌아가신 분인데 말야.”

 

에디트 슈타인은 다름 아닌 나의 가톨릭 세례명이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처음 방명록을 쓰는 날부터, 나는 글 아래에 세례명을 적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에디트 슈타인은 나야! 그건 내 세례명이고.”
“진짜? 반갑다~. 대체 누굴까 궁금해 했는데, 우린 네 팬이야!”

 

장난 섞인 이야기들이 싫지 않았다. 나 역시도 그녀들이 에디트 슈타인을 잘 알고 있음이 반가워 나중에 성녀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들의 이야기가 썩 정확히 들리지 않아서 조금 고민했다. 게다가 정은 언니는 그녀들과 아주 유창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금 열등감이 피어올랐다. 문득 언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방학 때가 되면 여행을 많이 한 편이에요.”

 

그래, 난 첫 여행이고, 모든 것이 처음이니까, 언니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지. 조금 이야기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와 다리를 쉬고 낮잠을 잤다. 한여름의 한기에 깨어 올려다 본 하늘의 해는 서편으로 꽤 기울였다. 숙소에서 나와 가까운 성당으로 갔다.

 

작은 성당에서 맑은 목소리로 성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애절하고 아름다워서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온 몸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순례자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나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내가 아는 성가는…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곧 고개를 도리질했다. 차마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내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성당에서 나와 바로 앞에 있던 작은 식당의 안내문을 읽었다. 저녁은 8시부터, 가격도 적당. 때가 되어 식당으로 가니 드문드문 순례자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고 홀로 4인 테이블을 받는 것이 조금 민망한 것도 잠시, 이것저것 메뉴를 시키고 열심히 글을 쓰며 비노 틴토(레드 와인)을 들이켰다. 그리고 어제 저녁의 한을 풀 듯 남김없이 먹었다.

 

지금까지 먹었던 메뉴 중에서 가장 풍성하고 맛이 있었다. 언니와 함께 와서 먹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저녁을 마치고 식당 바깥 노천으로 나와 맥주 한 잔을 시켜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뉘엿뉘엿 지는 햇살이 발치를 간질이는 따사로움을 느끼며, 하루를 마감했다.

 

“내일은 카스트로헤리츠까지 가요. 거기에 부엌이 있는 숙소가 하나 있대요. 거기에서 같이 밥 지어서 먹어요! 한국음식 너무 먹고 싶은 걸요.”

 

언니에게 떼를 써 약속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마당으로 드나드는 문 옆에 자리한 침대에 누워, 바람에 춤추듯 흔들리는 커튼을 붙잡아 바깥 하늘을 내다보고 곧 잠에 빠졌다. 새벽 잠결에 슬리퍼를 끌고 마당으로 나와 바라본 밤하늘에는 별빛이 쏟아져, 별자리를 구분할 수 없었다. 유성 하나쯤은 내리그을 법도 한데, 마음에 품어둔 소원이 없어서인지 아쉽게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막 이륙한 비행기의 명멸과 날벌레들의 날갯짓에 등불이 반사되어 만들어내는 몽롱한 빛에 선잠이 들려 할 때 쯤, 문득 지붕을 따라 밤 산책을 나서는 고양이 그림자가 살금살금 움직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달음질치는 시골의 밤, 참 기쁜 순례이다.

#산티아고가는길 #스페인 #도보여행 #성지순례 #카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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