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외딴 집에서 날 겨눈 칼은

[자전거 세계일주 38] 멕시코 멕시칼리 가는 길에 겪은 충격과 공포

등록 2008.01.03 09:06수정 2008.01.3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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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풍경 티후아나의 거리. 거미줄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펼쳐진 전깃줄이 발전과도기에 있음을 보여준다. ⓒ 문종성


멕시코 북서부에 위치한 바하 캘리포니아(Baja California)의 주도 멕시칼리(Mexicali)로 가는 길. 이미 지평선은 소슬한 가을 바람에 맨 몸을 떠는 앙상한 나뭇가지 끝 홍시처럼 노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낭만인 동시에 길을 어서 재촉하라는 위급신호다.

오전에는 멕시코 북부 지역을 독과점하고 있는 맥주 '테카테(Tecate)'의 본고장 Tecate 지역을 지났고, 이제 앞으로 20㎞만 가면 다시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난다. 얼마 안 가 해는 마지막 붉은 선혈을 토해내고 떨어졌지만, 어둑하게나마 시야는 확보되었다. 멕시코 국경지대에서 강도들의 출몰에 대한 경고를 수도 없이 듣고 또 봐왔기에 이제는 정신 바짝 차리고 달려야 한다.


얼마쯤 달렸을까. 시가지를 용감하게 벗어난 후 외딴 도로에서였다. 어둠 속에서 충분한 빛을 끌어모이기 위해 게슴츠레 고양이 눈으로 전진하다 보니 전방에 승용차 한 대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후미등까지 꺼진 걸로 보아 폐차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지나오면서 이미 그러한 차량들을 보아왔던 터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차량을 주시하고 속도를 줄인 채 반대차선으로 넘어가 달렸다.

인적 없는 곳에 세워진 차량 한 대. 뭔가 수상쩍었지만 나도 갈 길이 바쁜 몸. 검푸른 하늘에 하나 둘 별들이 얼굴을 내밀며 찬바람을 불러낸다. 그 속도보다 빨리 숙소 구하기를 재촉해야 했다. 차를 지나치면 전속력으로 달릴 생각이었다. 그것은 새가슴 담력이 아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 것이라고 자신있게 합리화시킬 수 있는 행동이었다.

왜 나쁜 예감은 어김 없이 맞는 걸까

그런데 왜 나쁜 예감은 어김이 없는 걸까. 그 순간 갑자기 운전수 쪽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20m 정도 전방이다. 마치 눈물 흘리던 악어가 먹잇감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사납게 입을 벌린 형국이었다. 낯선 사내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재빨리 핸들을 돌렸다. 그리고 그 남자가 나를 쳐다보는 순간 이미 몸의 모든 균형은 반대편으로 돌아서 있었다. 습격에 무방비인 상태에서 우선은 도망치는 게 급선무.


다행히 오르막을 올라왔기에 반대 방향은 내리막이라 손을 떠난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인적이 드문 도로. 야심한 시각에 후미등까지 꺼져 있던 차량. 내가 접근하자 갑자기 문이 열리는 차. 자전거에 여러 물건과 현금까지 있었고 더욱이 방어할 무엇도 없었기에 입맛에 딱 맞는 먹잇감일 수밖에.

그가 강도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불안한 확률을 움켜 쥔 채 얼마를 더 가기위해 무리하면서까지 도박을 감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리막에서 세찬 바람을 밀어내며 몇 분을 정신없이 달려가다 달랑 한 채 남겨져 있던 집으로 무작정 뛰어 들어갔다. 무엇이라도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이봐요! 거기 누구 없어요?"

다급한 소리는 폐가를 연상시키는 집안 구석구석으로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낡아 빠진 데다가 근처에 눈에 보이는 집이라곤 이곳 뿐이니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맑고 순수한 눈망울을 가진 소녀 야하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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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가족 의사소통의 오해로 간 떨어지는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 문종성


얼마 후 여인과 아이들 둘이 느릿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그들을 보자 일단 안심이 되었다. 최소한 강도라고 의심되는 자들의 손아귀에 걸려들 일은 피한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둑해졌다. 한 눈에 봐도 다 쓰러져가는 허름하기 그지없는 집.

하지만 나에겐 더 이상 선택권이 없었다. 다시 아픈 오른무릎을 빌어 그 길을 20㎞나 더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경계보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가족에게 일단 인사를 한 후 스페인어 회화책을 꺼내 들었다. 한 문장 말하고 다시 말하기까지 적잖은 침묵이 있었지만 그들은 생경스런 외국인의 등장이 신기한지 연신 웃어보일 뿐이다.

"저 도로, 위험해요. 강도. 나 도망왔어요. 다시 갈 수 없어요. 그래서 하룻밤, 잠, 머물러도 될까요? 날씨, 춥다. 이미, 그리고 어둡다."

회화책의 문장과 단어, 그리고 바디랭귀지를 조합한 대화는 다행히 가까스로 그들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결국 여인의 허락을 얻어 거실에서 자기로 했다. 땅으로 된 바닥이다. 냉기가 도는 지면이라 여인이 매트리스와 침낭을 가져다 주었다.

잠 잘 곳이 마련되자 여유를 가지고 털썩 의자에 앉아 바라보니 그제야 '씨(Si)'만 연발하던 여인의 아들 루이스(13·Luis)녀석과 딸 야하이라(12·yajaira)가 보다 더 사랑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특히 야하이라는 눈망울이 너무 순수했다. 손톱에 때가 끼고 옷차림은 구질구질했으며 머리도 며칠 안 감은 듯 푸석푸석했지만 수줍어하며 시선을 맞추는 그녀의 눈은 정말이지 한 송이 수선화처럼 순수해보였다.

뭐랄까.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 진흙으로 보일 정도로 그녀의 눈망울은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없는 살림에 최선으로 대해주었다. 아무 대접도 없이 그저 땅바닥 한 자리를 내주며 자라고 했지만 이보다 더 내가 기대할 만한 건 없으니 말이다.

불이 붙지 않는 버너... '숯불라면'을 택하다

"라면 좀 먹을래요?"


가방에서 라면을 꺼내 들었다. 폭우 뒤 폭염이 찾아오듯 놀람 뒤에 안정을 찾자 이내 극심한 배고픔이 찾아왔다. 이제야 먹을 걸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호의에 내가 답례로 할 수 있는 건 그저 라면을 같이 나누어 먹는 것 뿐이었다.

"우린 이미 저녁을 먹었는걸요. 괜찮아요."

이미 저녁을 먹었다기에 내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비상식량인 라면 3개를 아낌없이 그들에게 주었다. 성의이자 고마움의 표시로 단지 그것 밖에 할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내가 조금만 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훨씬 풍성하게 나눌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이 잠자러 가고 난 뒤, 출출해서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오랜만에 버너와 코펠을 빼들었다. 라면을 끓이기 위해 불을 붙이려고 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불이 붙지를 않았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했지만 끝내 실패.

그 때 망연자실한 채 주위를 둘러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름하여 숯불 라면. 마침 한 쪽 부엌에 숯불이 타고 있길래 라면과 물을 냄비에 같이 넣고 익히기로 한 것이다.

과연 끓이는 라면도 물 붓는 컵라면 아닌 숯불 라면이 제대로 완성될 수 있을 것인가? 예상은 적중! 생각보다 잘 익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후루룩 쩝쩝 소리를 가열차게 내가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비록 식수로 양치한 것 이외에 씻지도 못하고 찬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부엌 땅바닥에서의 잠자리를 준비했지만 안전하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수 있었다.

아까 그 강도일지 모를 그들에게 털렸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낮에만 다니자는 약속을 어겼으니…. 학습효과로 인해 내일부턴 해가 지기도 전에 알아서 숙소를 찾게 될 것이다. 침낭을 뒤집어 쓴 채 일기를 정리하고는 저녁 8시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고단한 하루가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몸은 피곤했지만 어둔 천장에 그리운 얼굴들이 선명하게 빛이 나길래 머리를 아예 침낭 속으로 집어 넣어버렸다. 눈을 감으면 선명해지는 그리움이지만 물리적 환경으로 어둠을 설정하면 그만큼 빨리 잠이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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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불 라면 시장이 반찬인 데다가 생경스러운 숯불로 끓인 라면이어서인지 아주 맛있게 먹었다. ⓒ 문종성


서슬퍼런 칼날... 침이 마르고 오금이 저린다

새근새근 잠이 들은 지 얼마 후 인기척에 설푼 잠이 깨었다. 한 노인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올라(Hola)."

나는 부엌 땅바닥에서 자고 있었으므로 졸린 눈을 비비며 그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냉기를 피해 더욱더 침낭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노인도 간단한 인사인지 뭔지 모를 나지막한 혼잣말을 내뱉고는 내 옆을 지나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나온 노인은 건너편 부엌의 불을 켰다. 그리고 들리는 쨍그랑 소리.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는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나를 향해 점점 크게 들려왔다.

"이 봐."

노인은 엄숙한 목소리로 날 깨웠다. 건너편 부엌에서 스며 나온 불빛은 졸려 감긴 눈임에도 실루엣보다 더 밝은 초점으로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그의 오른손에 서슬퍼런 칼을 쥐어져 있었다! 불빛에 반사된 칼의 반짝거림. 정말이지 단 1초 만에 강시처럼 벌떡 일어났다. 이토록 짧은 순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있다니!

"어떻게 들어온 거야?"

그는 내게 경계하면서도 위엄있는 투로 물었다. 하긴 그가 당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설령 내가 침입자라고 해도 칼을 쥐고 있는 그에게 모든 주도권이 달린 셈이니. 난 정신이 없어 허둥지둥 설명하려고 했지만 너무 급작스런 돌발상황에 머리 속이 하얗게 되어 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오해 받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부산을 떨고 있는데 그는 칼을 내 쪽으로 들이대며 위아래로 흔들면서 움직이지 말고 자리에 앉으라고 경고해 왔다.

'수상한 사람', 바로 나였군

노인은 70이 넘어 보이지만 완력이 젊은이들도 쉽게 감당할만큼 허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그는 총이나 여타 무기 습득의 여지가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최고의 무기인 칼을 쥐고 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낯선 누군가로부터 칼질을 위협받고 있으니…. 설마설마 하면서도 입에 침이 바싹 마르고 오금이 저려 왔다.

그 때 마침 루이스와 야하이라의 이름을 적어놓은 수첩을 생각해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은 채 팔을 뻗어 수첩을 집어 들고서는 아무런 부가 설명 없이 둘의 이름만 외쳐댔다.

"루이스, 야하이라!"
"걔네들을 알아?"
"Si, si.(네, 네). 그들이 저를 여기서 자라고 허락해 주었어요."

그 때서야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채고 최소한 내가 침입자가 아니란 게 밝혀지면서 그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칼날을 내게서 치웠다. 그것은 마치 독을 가득 머금은 코브라가 머리를 돌리는 것과 같았다. 십년감수했다. 꽉 조여진 창자가 갑절로 풀어지는 듯 긴장을 잃은 온 몸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 있는 내 앞을 왔다갔다 하던 그가 결국 밖으로 나가더니 다시 들어와서 하는 말.

"그랬던 거로군. 안심하고 편히 자게나. 별 일 없을 테니."

'아니, 이 사람아, 내가 당신 때문에 지금 심장이 떨려 죽는 줄 알았는데 편히는 무슨?'이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알았어요."

절대강자 앞에서 주눅들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수상한 사람을 경계하던 난 졸지에 수상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시간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집주인 허락받고 숙박한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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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 총알 세례를 받았는지 돌팔매질을 당했는지 유리창은 깨져있고, 주유기 쪽은 아예 무너져 내려 있다. 멕시코 북부에는 이처럼 버려지고 깨진 주유소들이 많이 보인다. ⓒ 문종성


놀란 가슴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무지 눈이 감기지 않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해도 얼마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던지 함께 자던 고양이의 미묘한 움직임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동이 틀 무렵에야 비로소 오해가 풀렸다. 여인의 집이 아닌 이웃집이었던 것이다. 여인이 그 사실을 내게 말했지만 나로서는 스페인어의 한계로 인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누가 온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방에서 자지 못하게 하고 땅바닥에서 자라고 했던 것이다.

문제는 노인이 자신의 집에 누가 들어온다는 사전 정보가 없었기에 나를 침입자로 오해했던 것이다. 그럼 여인과 아이들의 집은? 애석하게도 집 뒤에 30m 정도 떨어진 RV(캠핑카) 폐차에서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이 집보다 더 나쁜 조건이다.

새벽 6시. 평소보다 일찌감치 출발 채비를 마쳤다. 사실 충격을 씻기 위해서라도 얼른 빠져나오고 싶었다. 지난 밤 하룻밤 인연으로 얽힌 루이스 가족, 그리고 노인과 인사를 주고 받으며 집을 빠져 나왔다. 밤새 얘기치 않은 충격과 피로가 더욱 몸을 무겁게 한다. 에고, 어쩌자고 여행자 팔자가 이리한지.

지난 번 미국 네브레스카 주에서는 총기 위협을 당하더니 멕시코 내려와서는 이젠 칼 위협까지. 정신없이 나오느라 졸린 눈은 물 대신 찬바람으로 깨워야 했다. 하지만 언제나 긍휼한 사랑으로 자비를 베푸는 신의 섭리는 공평한 법.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충격을 씻어 내기 위한 최고의 선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것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멕시코에서 강도를 만나 다음 호부터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이해 부탁 드립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멕시코에서 강도를 만나 다음 호부터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이해 부탁 드립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세계일주 #자전거 #멕시코 #비전노마드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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