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에 끌려간 박제상이 잡히고 처형된 곳

[대마도 기행] 대한해협을 앞바다로 둔 미나토와 사스나

등록 2008.02.09 14:03수정 2008.02.0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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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순국비 대마도 미나토의 방파제 바로 앞에 서 있는 박제상 순국비. 대마도 최북서단인 이곳에서 부산까지는 49.5km밖에 되지 않는다. 이곳에서 박제상은 왕의 아우 미해(삼국사기에는 미사흔)를 탈출시킨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 정만진


부산의 국제선 부두에서 대마도의 북부 항구 하타카쯔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남부 항구 이즈하라까지는 두 시간 반 정도 걸린다. 부산에서 대마도로 가는 대부분의 배는  시청이 있는 이즈하라로 간다. 하타카쯔든 이즈하라든 둘 다 대마도의 동쪽 해안에 있다. 대마도가 일본의 땅이니 섬사람들이 본토를 오가려면 아무래도 동쪽 해안에 큰 항구를 발달시켜야 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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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방파제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국산(?) 쓰레기 미나토와 신라(울산, 부산, 거제)의 거리가 얼마나 짧은지, 그리고 이곳이 왜국과 신라의 뱃길이었음을 증명해주는 듯이 보이는 한국산 쓰레기들이 해안 곳곳에 널려 있다. ⓒ 정만진


대마도에는 이즈하라에서 하타카쯔까지 이어지는 관통 도로가 놓여 있다. 이즈하라에서 출발하여 이 도로를 한 시간 반 정도 달리면 에코라는 작은 마을에 닿는다. 하타카쯔에서 에코까지는 삼십 분 정도의 거리이다. 에코 삼거리에서 관통 도로를 벗어나 북서쪽으로 난 작은 마을길로 들어서면 미나토에 닿는다. 대마도 곳곳에서 보게 되는 각종 안내지도의 어디에도 일언반구 언급이 없지만 우리 나라 관광객들 중에는 꼭 이 미나토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박제상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관계 부분을 읽어본다.


그(제상)는 왜국에 도착해서 거짓말을 했다.
“계림왕이 아무 죄도 없는 우리 부형을 죽였기로 도망해서 여기 온 것입니다.”
왜왕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주어 편히 거처하게 했다. 이때 제상은 늘 미해를 모시고 해변에 나가 놀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다 왜왕에게 바치니 왜왕은 매우 기뻐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마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는데 제상이 미해에게 말했다. 
“지금 빨리 떠나십시오.” 
미해는
“그러면 같이 떠나십시다.”
했으나 제상은 말한다. 
“신이 만일 같이 떠난다면 왜인들이 알고 뒤를 쫓을 것입니다. 원컨대 신은 여기에 남아 뒤쫓는 것을 막겠습니다.”
미해가 다시 말한다. 
“지금 나는 그대를 부형처럼 여기고 있는데 어찌 그대를 버려두고 혼자서만 돌아간단 말이오?” 
제상은 말한다.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대왕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는 술을 부어 미해에게 드렸다. 이때 계림 사람 강구려가 왜국에 와 있었는데 그를 딸려 호송하게 했다.
미해를 떠나보내고,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서 이튿날 아침까지 있었다. 미해를 모시는 좌우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 보려 하므로 제상이 나와서 말리면서 말했다.
“미해공은 어제 사냥하는 데 따라다니느라 몹시 피로해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자 좌우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이때 제상은 대답했다. 
“미해공은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좌우 사람들이 급히 달려가 왜왕에게 고하자 왕은 기병을 시켜 뒤를 쫓게 했으나 따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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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溱]는 수문(水門) 미나토는 왼쪽 산 들머리에 있고, 박제상 비도 거기에 있다. 오른쪽 산줄기의 위에는 풍력발전소가 있다. 미나토는 우리 나라 식으로 표현하면 수문이라는 뜻이니, 옛날에도 배가 출입하고 물이 드나들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 정만진


미나토는 작은 포구이다. 마을은 자고천을 끼고 길게 형성되어 있다. 강이 끝나면 곧장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 앞에는 아무 것도 없고, 수평선만 가물가물할 뿐이다. 수평선 너머는 바로 신라 땅이다.

미나토 마을 뒤에 병풍처럼 자리 잡고 있는 야산은 평지 없이 곧장 바다에 발을 드리우고 있는데, 그 산모퉁이를 따라 왼쪽으로 해안선을 타고 들어가면 뾰족한 돌출부가 나타난다. 이 돌출부가 바로 대마도에서 가장 서북단인 사오자키이다. 박제상이 왜 이곳에서 미해를 탈출시키는지 저절로 헤아려진다. 여기서 신라까지는 불과 49.5km밖에 안 된다. 대마도에서 신라까지 가장 가까운 지점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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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풍경 강(자고천)을 낀고 이어지는 미나토 마을의 집들. 마을이 끝나면(사진의 오른쪽 산자락 끝) 박제상 비가 나오고, 비석 오른쪽에는 방파제가 대한해협을 바라보고 서 있다. ⓒ 정만진


미나토 마을에서 자고천을 따라 걸으면 집 한 채 없이 그대로 바다에 닿는다. 강물과 바다가 직접 닿는 부분을 제외하면 포구는 온통 높은 방파제로 막혀 있다. 방파제를 보면 이곳의 지명 미나토[溱]가 우리식 표현으로 수문(水門)이 되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박제상을 기리는 비는 방파제 가까기 세워져 있다. 미해를 탈출시킨 박제상이 왜의 병사들에게 체포된 곳이 미나토인 까닭에 후세 사람들은 이곳에 비석을 세워 그를 기리는 것이다. 비석을 지나 방파제 왼쪽 옆으로 바다까지 다가가 물에 손을 담그고 고개를 들어 북서쪽을 바라본다. 아마 박제상도 미해를 배에 태워 탈출시킨 뒤 그렇게 신라쪽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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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나 박제상이 처형된 곳으로 비정되는 사스나는 지금도 번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마도 관통도로가 읍 중심부를 통과하는 포구인데다, 마을 안을 지나는 관통도로에서 바다까지 줄곧 작은 도로들이 이어져 있고, 주요 관공서들이 빠짐없이 자리하고 있다. ⓒ 정만진


미나토에서 에코로 돌아와 10분 정도 하타카쯔 쪽으로 관통 도로를 달리면 사스나에 닿는다. 박제상은 미나토에서 잡혀 사스나로 끌려간 듯하다. 사스나는 옛날 우리 나라와 일본을 오가는 배를 검문하던 포구였다. 당시 신라를 침공할 계획으로 박제상과 미해를 침략군의 일원에 편성하였던 왜왕은 침략군 본부대를 사스나에 주둔시켰을 것이다.


박제상은 미해를 쉽게 탈출시키기 위해 신라 땅과 가장 가까운 미나토 인근 야산에서 사냥을 하는 척하며 왜의 장수들을 속인 듯 여겨지는데, 실제로 미나토 인근에는 지금도 ‘대마 야생 생물 보호센터’가 있고, 미나토와 사스나 사이에는 풍력발전소가 세워져 있는 센보우마키(千俵蒔山)라는 산이 자리잡고 있다. 사냥을 할 만한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제 박제상이 죽는 장면을 삼국유사를 통해 살펴보자.

왜왕은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돌려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한다. 
“나는 계림 신하이지 왜국 신하가 아니오. 이제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어 드렸을 뿐인데, 어찌 이 일을 그대에게 말하겠소.” 
왜왕은 노했다. 
“이제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추어 너에게 쓸 것이다. 만일 왜국 신하라고만 말한다면 후한 녹을 상으로 주리라.” 
제상은 대답한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을 받지 않겠다.”
왜왕은 노했다. 제상의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벤 위를 걸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또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워 놓고 다시 물었다.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라는 섬 속에서 불태워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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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나 중심가에서 바라본 바다쪽 풍경 바다에서는 좁은 물길이지만 만 안으로 들어오면 상당히 넓은 포구가 사스나이다. 사스나에서는 옛날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를 오가는 배를 검문했다. ⓒ 정만진


치술령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부인은 박제상이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끝내 혼절하여 숨을 거두고 만다. 어머니와 함께 식음을 전폐하고 산꼭대기에서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두 딸도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어머니와 언니, 동생의 장례를 치르고, 아직 철도 없이 어린 남동생을 조금이나마 키워놓고 죽어야겠다고 결심한 둘째 딸만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산을 내려온다.

부인과 두 딸이 죽은 자리에는 커다란 바위가 솟구쳤으니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일러 망부석이라 하였다. 부인은 죽어 몸은 돌이 되었고, 영혼은 새가 되어 바다 쪽으로 날아가다가 건너편 산속의 큰 바위 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새[鳥]가 숨은[隱] 바위를 은을암이라 이름지었고, 치술령을 떠난 새가 중간에 쉬었다 간 동네를 비조(飛鳥)마을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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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만진

박제상은 양산에서 태어났고, 울산에서 배를 타고 왜국으로 건너갔다가 대마도에서 죽었다. 그의 부인과 딸들은 치술령에서 죽었다. 박제상과 그의 부인, 딸들과 관련한 역사의 현장으로는 양산 효충사(孝忠祀)와 춘추공원, 경주 망덕사지와 장사 벌지지, 울산 유포석보의 배 출발지, 대마도의 미나토와 사스나, 치술령 일대의 박제상 유적지(치산서원, 치술령, 비조마을, 은을암, 망부천)가 있다. 이제 이 모든 곳을 두루 다녀보았으니 박제상과 그의 부인, 딸들의 슬픔을 기리는 애절한 노래 두 곡을 소리내어 따라불러 그들의 혼을 위로하고자 한다.

김종직 <치술령 망부석>

審述嶺頭望日本 치술령 고개에 올라 일본을 바라보니
粘天鯨海無涯岸 하늘에 닿은 푸른 바다는 끝이 없구나
良人去時但搖手 좋은 님 떠나실 때 손을 흔드시더니
生歟死歟音耗斷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마저 끊겼구나
口音耗斷長別離 소식이 끊기고 멀리 헤어졌으나
死生寧有相見時 죽든 살든 언젠가는 서로 볼 날 있으리
呼天便化武昌石 하늘 향해 울부짖다 망부석이 되었으니
烈氣千年干空碧 매운 기운 영원토록 창공에 푸르리라

김소월 <초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 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박제상 #대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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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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