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 여배우의 레즈비언 연기

<작은 신의 아이들>에서 본 말리 매틀린, '미드'에서 다시 만나다

등록 2008.02.19 14:23수정 2008.02.19 14:40
0
원고료로 응원
바흐를 눈으로 보여달라던 청각장애 배우

a  <작은 신의 아이들> 스틸컷

<작은 신의 아이들> 스틸컷 ⓒ 작은 신의 아이들


말리 매틀린을 처음 보았던 건, 스물하고도 한 살 때쯤이었습니다. <작은 신의 아이들>(랜다 헤이즈 감독. 윌리암 허트 주연)이라는 1986년작 영화였고, 같은 해에 쟁쟁한 배우들을 제치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설명이 낡은 비디오 테이프 뒷면에 쓰여있었죠. <카드로 만든 집>이나 <레아>처럼 자폐적 주인공들을 찾아다니던 곰팡진 청춘이었고, 실제로도 80%의 청각장애라는 말리 매틀린의, 사연 많아 보이는 앳된 얼굴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영화는 알아주는 대학을 나온 엘리트 교사가 농아 학교로 부임와 학생들의 마음을 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말리 매틀린은 마음을 닫고, 농아학교의 청소부로 일하며 살아가는 아가씨입니다. 꽤 미인이고, 꽤 공격적인 성깔을 가졌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입을 열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입술을 읽고 말을 하라고요. 수화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한정적이고, 계속 수화로 말하기를 고집한다면, 세상에 어울려 살아가지 못할 테니까요.

"언니의 남자친구들이 데이트를 신청하러 몰려들었고, 그들은 수화를 배우려 들지 않았어.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서 그저 하고 하고 또 하고. 섹스는 보통 여자들하고 다르지 않았지. 더 잘했어!"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마음을 연 여자는, 일을 그만두고 남자의 집으로 갑니다. 함께 포커를 치기도 하고, "귀머거리 아기를 낳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죠. 파티장에서 음악이 들리든 말든 아랑곳 않고 자기 멋대로 춤추던 여자치곤, 좀 전형적인 선택입니다. 말리 매틀린은 실제로 영화 속 남자와 결혼에 골인해 3년 후 이혼하기도 했습니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그러니까 꽤 교육적인 영화인 셈입니다.

지금보면 조금은 촌스러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바흐를 눈으로 보여달라"던 말리 매틀린의 수화였습니다. 완벽한 종지로 유명한 바흐. 더더구나 음악의 '아버지' 바흐. 말리는 이를 들을 수 없지만, <작은 신의 아이들>은 구원의 영화였고, 그러한 고전적인 주제에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은 꼭 맞았습니다.

대체 어떤 아버지가 딸이 게이라고 싫어하나요


a  <the L word> 5시즌 에피소드 7

5시즌 에피소드 7 ⓒ the L word


최근 설날 연휴를 시작으로 미드 <엘 워드>를 연달아 보았는데, 여기에서 말리 매틀린을 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엘 워드>는 실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제작진들이 만드는 미국 레즈비언 드라마입니다. <미즈>의 편집장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출연하기도 하는 드라마죠. 현재 5시즌 7편까지 나와있습니다. 말리 매틀린은 4시즌(1년 전 방영분)에 등장했습니다.

<엘워드>에서 말리 매틀린은, 미술 대학의 교수이자, 전위적인 조각가로 등장했습니다. 미술 대학의 학장인 벳 포터(제니퍼 빌즈 분)의 상대역입니다. 예쁘고 똑똑하고 부자인 벳은, 한편으론 완고한 구석이 있는 아프리카계 레즈비언입니다. 8년 동안 사랑해온 티나와의 사이에 정자기증으로 임신한 아기도 두고 있지요. 비록 티나가 임신한 사이 잠깐 바람을 피는 바람에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지만 말입니다.


여튼 정치계의 러브콜도 받고, 조교와 원나잇도 하고, 가시밭길을 걷던 벳의 앞에 조디(말리 매틀린 분)가 나타납니다. 작업복을 입고 톱질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 신의 아이들>에서 서툰 발음을 두려워해 입을 열지 않던 배우.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40대에 이르러서는, 뭉툭한 발음이지만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네요. 조디의 수화를 웃음까지 번역하는 개인 통역사도 함께 있습니다. 기부자의 방문을 알리며, 학생의 급진적인 작품 <미국의 낙태>를 잠시 숨겨달라는 벳의 부탁에, 조디는 단단히 뒷통수를 치고 맙니다.

5시즌 중반에 접어든 지금 이 커플이 잘 풀릴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말리 매틀린은, 벳 포터라는 인물을 성장시킬 훌륭한 조연이라는 것. 성애는 로맨스로 포장되지만, 많은 경우 권력의 문제입니다. 레즈비언 섹스라고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극중 인물 제니의 다소 악의적인 표현대로라면, '권력을 이용해 다른 여자들과 자는' 왕언니 벳도, 적수를 만난 셈입니다.

<엘워드>에서 조디와 벳을 위해 흐르는 배경음악은 핑크의 <dear Mr.President>입니다. "딸이 게이라고 싫어하는 아버지는 대체 어떤 아버지죠.(And what kind of father might hate his own daughter if she were gay?)"  바흐와 구원도 좋았지만, 아마도 이들의 테마는, 성장과 건강함이 아닐까요. 42세 청각장애 배우의 레즈비언 연기 앞에, 벳의 이 대사만은 공감 100%입니다. "너 참 예쁘다".

드라마에서와 달리 제니퍼 빌즈와 말리 매틀린은 둘 다 이성애자라고 해요. <작은 신의 아이들>로부터 20여년이 지났고, 말리 매틀린은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들을 두고 있습니다. <로 앤 오더(law and order>, <위기의 주부들> 같은 드라마에도 출연했다고 하네요.
#말리 매틀린 #작은신의아이들 #엘워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3. 3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4. 4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5. 5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