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핀, 시대의 얼굴들을 그리다

[서평]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

등록 2008.03.06 08:49수정 2008.03.06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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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볼가 강의 뱃사람들> 온 몸으로 범선을 끄는 볼가 강의 뱃사공들.

<볼가 강의 뱃사람들> 온 몸으로 범선을 끄는 볼가 강의 뱃사공들. ⓒ 한미숙


우울한 얼굴들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에서 이따금 무거운 눈길이 번쩍거렸다. 얼굴은 땀에 젖어 번들거렸고, 옷은 시커멓게 되었다······깨끗하고 향기롭고 화려한 사람들의 무리와 이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인가! (본문에서 )

일리야 레핀(1844-1930)은 미술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생소한 이름이다. 그렇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그림 <볼가 강의 뱃사람들>은 낯익은 그림으로 러시아혁명 이전의 고난에 찬 민중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과 현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그려

a  책 겉표지

책 겉표지 ⓒ 한미숙

이 책은 러시아 화가 일리아 레핀의 그림세계를 3부로 구성하였다. 1부에서는 레핀의 생애와 창작예술과정을 정리하고, 2부는 창작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브로드스키의 글을 번역하였으며, 3부는 레핀이 쓴 편지글들을 모아놓았다.

1844년에 출생한 레핀은 당시 엘리트 과정을 밟아 나간 화가이다. 유럽, 특히 프랑스 유학에서는 자신의 그림이 나아갈 방향을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핀의 그림은 사실과 현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그림의 풍경에 덧붙여,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풍경화이자 사실화라고 할 수 있다.

한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 보이는 데에는 사실화만큼 생생한 표현방식이 더 없을 듯하다. 레핀의 예술이 때로 난해하다는 비난을 받는데, '그것은 그가 전혀 다른 사물을 전혀 다른 양식으로 동시에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의 마음, 그리고 소용돌이 치는 격변을 나타내는 황제들의 표정은 레핀의 붓을 통해서 사실보다 더 실제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그림으로 당시 시대의 울분과 정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황녀 소피야>는 러시아를 쥐고 흔드는 절대 권력의 표상이다. 변화된 시대 앞에서 참을 수 없이 드러난 분노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러시아 혁명의 피 흘림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듯 그 표정이 섬뜩하다. 레핀은 최고 권력과 지위가 한 순간 세상 가장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날을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황족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황족과 대척점에 서 있는 레핀의 작품이 <볼가 강의 뱃사람들>이다. 당시 내로라하는 유명인들의 찬사를 들은 이 작품은 돼지우리만도 못한 주거와 삶을 위해 연명하는 절대다수 밑바닥 인생들이 드러난다.

<황녀 소피야>에서는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분노가 얼굴에 나타나지만, <볼가 강 뱃사람들>에게 스민 참상은 온 몸으로 견뎌야 하는 지옥 같은 생활뿐이다. 그들의 참혹함은 언제 폭발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온 몸으로 범선을 끄는 <볼가 강의 뱃사람들>에서 뱃사공을 억누르는 무거운 밧줄의 힘이 소리 없이 느껴진다.

그러나 레핀이 뱃사공들을 억압하는 무거운 분위기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주인공들의 위대함을 그렸고, 그들의 아름다운 영혼과 육체적 힘을 찬양했다. (본문에서)

같은 나라 안에서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황족과 민중들 삶이 ‘러시아적으로 나타난 러시아의 가치’가 러시아 혁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어쩌면 인간 본연의 태도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러시아의 가치가 오직 러시아만의 것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레핀의 손끝에 나타난 생생한 인간의 표정이 한 시대 실상과 함께 그 스스로 인간임을 찾으려는 절대가치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볼가 강의 뱃사람들>이 지금, 우리 사회의 실상에도 겹친다. 특히 새 정부 내각들의 면면을 보며 러시아 황족이 함께 떠오르는 것은 사실화가 주는 교훈 때문만일까?

덧붙이는 글 |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 일리야 레핀 외, 이현숙 옮김/써네스트
책값:20,000원


덧붙이는 글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 일리야 레핀 외, 이현숙 옮김/써네스트
책값:20,000원

일리야 레핀 -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I. A. 브로드스키 지음, 이현숙 옮김,
써네스트, 2008


#레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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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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