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현장 증거물, 그 안에 범인이 있다

[불멸의 탐정들 26] 링컨 라임 & 아멜리아 색스

등록 2008.03.30 12:04수정 2008.03.30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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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범죄현장은 아무리 미묘할지라도 범인의 존재로 인해 변화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범죄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위치를 파악하여 정의를 구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a <본 컬렉터> 링컨 라임 시리즈 1편

<본 컬렉터> 링컨 라임 시리즈 1편 ⓒ 노블하우스


링컨 라임이 쓴 현장감식 교과서의 서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범인은 항상 범죄현장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둔다는 이야기다.


그 흔적의 종류는 여러가지다. 어설픈 범인은 자신의 신분을 알려줄 결정적인 단서를 흘려두기도 한다. 운전면허증이나 신용카드 영수증 또는 큼직한 지문 여러개 등.

지능적인 범인들은 그런 단서 대신에 아주 미미한 흔적을 남긴다. 구두에 묻혀온 흙이나 모래, 옷에서 떨어진 섬유 몇 가닥 또는 아침에 뿌리고 나온 향수의 향기 등. 첨단장비를 동원하지 않으면 식별이 불가능한 흔적들이다. 이런 미량 증거물을 가지고 어떻게 범인을 추적할까?

미국작가 제프리 디버가 창조한 인물 링컨 라임은 이런 증거물을 추적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링컨 라임은 범인을 추적하는 단서로 오직 증거만을 믿는다.

그는 탐문수사 또는 증인이나 목격자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링 기법에도 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링컨 라임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범죄현장에 남아있는 증거물 뿐이다.

이것은 링컨 라임이 수사관이기 이전에 뛰어난 과학자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링컨 라임이 활동하는 장소는 미국의 뉴욕이다. 링컨 라임은 뉴욕의 역사와 지질, 식물분포, 생물학적 환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이용해서 증거물을 추적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범죄현장에서 독특한 흙이나 미량의 가루가 발견된다고 해보자. 링컨 라임은 그 흙이 뉴욕의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 볼수 있는 것인지 대번에 알아차린다. 미량의 가루역시 마찬가지다. 그 가루의 성분을 분석하기 위해서 현미경은 물론이고 가스크로마토그래피, 질량분석기 등의 첨단장비를 동원한다.

증거물을 분석해서 범인을 추적하는 링컨 라임


그렇게 분석된 결과를 가지고 링컨 라임은 범인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이다. 범인이 어느 장소에서 이런 증거물을 옷에 묻혀가지고 왔는지, 범인이 사는 곳은 어떤 지역인지, 범인이 무슨 직업에 종사하고, 어떤 사람들과 자주 접촉하는지 등등.

증거물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 링컨 라임은 범죄현장의 보존을 가장 우선시한다. 범죄현장이 타인에 의해서 훼손되거나 현장감식반이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없다.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자신의 부하를 해고해 버리기도 한다. 링컨 라임에게 있어서 증거물은 '범죄수사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열정과 재능 때문에 링컨 라임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뉴욕시경 과학수사국장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열정이 그에게는 오히려 독이었을까. 링컨 라임은 지하철공사장에서 현장감식을 하다가 그만 화를 당하고 만다. 공사장 대들보가 무너지면서 링컨 라임을 덮친 것이다. 링컨 라임은 척추뼈 중에서 제4경추가 박살나는 중상을 입는다.

그 사고 이후에 링컨 라임은 전신마비환자가 되었다. 전뉴욕을 누비고 다니면서 범죄현장을 조사하고 부하들을 통솔하던 인물이 졸지에 침대에 누워서 시쳇말로 똥오줌 못가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링컨 라임의 몸이 전부 마비된 것은 아니다. 머리와 목, 어깨는 움직일 수 있다. 어깨 아래로는 왼손 약지만이 살아있다. 큰 부상을 당했지만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니까 침대에 누워서도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증거물을 분석하고 추론하는데에는 무리가 없다는 얘기다.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인 <본 컬렉터>에서 링컨 라임은 이런 상태로 등장한다. 작가인 제프리 디버도 참 극단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고를 당한 이후로 링컨 라임은 이혼했고, 뉴욕시경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은퇴했다. 사고에 대한 보상으로 300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았고, 장애연금도 받는다. 금전적으로는 별 어려움이 없다.

링컨 라임에게 어려운 점은 바로 무료함과 무력감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컵하나도 들어올리지 못한다. 얼굴이 간지러울 때 긁지도 못한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시간이 가기 만을 기다린다. 링컨 라임은 과거를 회상하고 자살을 꿈꾸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죽일 권리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사고 이후에 전신이 마비된 링컨 라임

a <사라진 마술사> 링컨 라임 시리즈 5번째 작품

<사라진 마술사> 링컨 라임 시리즈 5번째 작품 ⓒ 랜덤하우스


뉴욕시경의 옛동료들은 링컨 라임이 이렇게 썩어가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이들은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하자 그 사건을 가지고 링컨 라임에게 찾아온다.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그의 현장감식기술과 미량 증거물 추적능력을 사건수사에 응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링컨 라임에게도 좋은 일이다. 자신을 덮친 운명을 한탄하는 일에서 벗어나 다시 범인을 추적하는 흥분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링컨 라임의 육체는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증거물을 분석하면서 그의 생각은 온 뉴욕을 여행하고 다닌다.

컬럼비아 대학교 시계탑 위로, 센트럴 파크의 흙과 석회암과 야생동물의 배설물 위로, 가솔린과 디젤연료가 배합된 선착장 위로, 톱밥이 뒤섞인 브롱크스의 퇴락한 주택가 위로….

링컨 라임은 전신마비환자이기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면 그의 손발이 되어서 현장을 누빌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인물은 아맬리아 색스다. 링컨 라임보다 10살 정도 나이가 적은 여성경관이다.

<본 컬렉터>에서 아맬리아 색스는 3년째 순찰근무중인 31세의 경관으로 등장한다. 색스의 아버지도 역시 순찰경관이었다. 색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경찰에 입문했고, 뛰어난 자동차운전과 사격실력을 가지고 있다. 늘씬한 체구에 얼굴도 예뻐서 경찰이 되기 전에는 잠시 패션모델 일을 하기도 했다.

<본 컬렉터>에서 색스는 살해당한 시신을 순찰도중에 발견한다. 그리고 링컨 라임이 이 사건에 자문 역할을 하면서 그의 눈에 띄어서 현장감식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물론 라임과 색스는 처음부터 티격태격한다. 라임이 색스에게 현장감식업무를 하라고 주문하자 색스는 반발한다. 현장감식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식도,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임은 고집불통의 인물이다. 어르고 달래서 결국 색스를 현장으로 보낸다. 라임은 현장에 도착한 색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피해자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데도 일부러 구조를 늦추기도 한다.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링컨 라임과 아맬리아 색스

수갑에 묻어있는 미량 증거물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시체의 손목을 톱으로 절단하라고 하는가 하면, 통채로 익어버린 시신의 몸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코를 대고 맡아보라고 말한다. 색스는 당연히 이런 라임에게 반발하고 분통을 터뜨린다. 그럴때면 라임은 태연하게 말한다. '이 일을 견디려면, 죽은 사람들을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해.'

이렇게 시작된 라임 & 색스 콤비의 활약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진다. 뉴욕시경은 난해한 사건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링컨 라임의 집을 찾는다. 뼈를 신봉하는 사이코 살인마가 사람들을 연쇄적으로 죽이고, 중국에서 건너온 범죄자는 밀입국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폭파시킨다. 냉혈한 살인청부업자가 끈질기게 희생자의 뒤를 쫓고, 희대의 마술사는 마술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

이때마다 라임과 색스는 함께 호흡을 맞추어서 사건을 추적한다. 색스는 라임에게서 배운대로 현장을 감식해서 증거물을 끌어모은다. 라임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추론으로 그 증거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파한다. 범인보다 한 발 앞서나가려면, 범인이 남긴 흔적으로부터 범인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라임은 범죄자들의 표적이 된다. 뛰어난 두뇌를 가진 범죄자도, 자신의 행동을 놓치지않고 추적하는 라임의 능력에 혀를 내두른다. 그리고 대담하게 라임의 집에 쳐들어가서 그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범죄자들은 라임이 전신마비환자라는 것을 보고서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링컨 라임에게는 오직, 정신만이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을 그들도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신이 핵심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다. 라임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육체적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 척추신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병원에서 '척추 재생 및 구축 수술'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수술은 위험하기로 유명하다.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잘못되서 육체상태가 더 악화되거나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많은 수술이다. 라임은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작은 희망에 모든 것을 걸려고 하는 것이다. 이 수술을 통해서 라임은 다시 예전처럼 육체의 기능을 얻을 수 있을까?

신체기능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링컨 라임

a <12번째 카드> 링컨 라임 시리즈 6번째 작품

<12번째 카드> 링컨 라임 시리즈 6번째 작품 ⓒ 랜덤하우스


수술을 기대하는 라임의 태도가 변하는 것은 <돌원숭이>에서 만난 중국인 형사덕분이다. 그 형사는 중국인 특유의 사고방식으로 라임을 설득한다.

당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라고, 운명이 당신을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사고 때문에 당신은 더욱 유능한 수사관이 될수 있었던 거라고. 사고가 오히려 라임을 균형잡힌 상태로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다.

라임은 처음에 이런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중국인 형사의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육체상태 때문에 때로는 화가 나지만, 식은 재에서 불사조가 날아가듯이 언젠가는 분노도 사라지고 균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라임은 수술 대신에 운동을 시작한다. 한차례 도박에 모든 것을 거는 것 보다는, 느리지만 착실한 노력을 통해서 자신의 육체를 돌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라임은 재활의사가 만들어준 프로그램에 따라서 조금씩 꾸준히 운동을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던가. 이런 노력 덕분인지 <12번째 카드>에서 라임은 그동안 마비상태였던 오른손을 움직이는데 성공한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색스는 눈물을 흘리면서 라임을 끌어안는다. 작은 희망을 바라보고 노력한 끝에 결국 불가능에 도전해낸 것이다. 라임에게 중요한 것은 오른손을 움직였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을 통해서 결국 자신의 자부심을 끌어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한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망가진 몸이 아니다. 라임의 표현처럼 스스로를 어떤 인간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느냐 하는 결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라임과 색스는 작은 승리를 거두어내지만 때로는 그 작은 승리에 모든 희망을 걸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것은 범죄수사 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본컬렉터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1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추리소설 #탐정 #링컨 라임 #제프리 디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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