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역사팩션 44] 단소는 말하고 있었다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상해의 영혼들 편

등록 2008.04.11 17:33수정 2008.04.1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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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를 찾은 민제호는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미국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뉴욕 트리뷴지의 기자 출신인 국무장관 존 헤이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스플랜디드 리틀 워’, 즉 ‘빛나는 작은 전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앞으로 큰 전쟁이 남아 있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한 발언이었습니다.


필리핀을 점유한 당시 미국의 대 중국 무역량은 2%에 불과했습니다. 무역량을 확대하고 싶었던 미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을 저지해야 했습니다. 미국은 열강의 중국 분할을 막기 위해 열강들에게 ‘오픈 도어 폴리시’, 즉 문호 개방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에게도 대등한 무역 조건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열강들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른 열강들이 모두 동의한다면 우리도 동의하겠다는 회답을 국무장관 존 헤이에게 했습니다. 이것은 열강들이 얼마나 기회주의적인지를 알려 주는 사건입니다. 또한 약자에게는 무자비한 그들이 강자에게는 얼마나 무소신한지를 알려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저는 최소한도 중국의 영토는 보전되리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미국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은 땅보다 재화를 원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중국 시장이 어느 한 나라에 넘어가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민제호가 강연을 마치자 박수 소리가 떠나갈 듯 울렸다. 강연 도중 박은식을 비롯한 원로들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고 학생들은 눈을 빛냈다. 백주원은 누구보다도 큰 감동을 받은 듯했다.

신규식은 신한혁명당의 실패를 거울삼아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어떤 일이든지 준비하며 다지는 시간과 사전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재작년에 이미 박은식을 단장으로 하는 ‘대동보국단’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본부는 상해 프랑스 조계 내 명덕리에 두었고 시베리아와 간도와 국내의 애국지사들과 연계하는 일도 거의 이루어져 있었다.


지난 2년 간 국제정세도 많이 바뀌었다. 우선 러시아에 2월혁명이 일어났고, 소수민족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핀란드와 폴란드가 독립했으며, 이스라엘에도 독립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규식을 고무시킨 것은 광동의 호법정부가 세력을 확장하며 신해혁명의 기운을 회생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손중산의 광동정부는 세계대전의 협상국 연합에 합세하는 데 성공한 상황이었다.

이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첫걸음을 디딜 때가 되었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대동단결선언’을 준비했다. 여기에는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김규식, 조성환, 홍명희 등 14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신규식은 일을 만들어 놓고 자신을 대표로 올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신채호는, 이번에는 발기인 대표로 신규식이 올라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극구 사양했다. 그것은 겸양의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들어진 조직이 오래 존속되기 위해서는 만든 당사자가 표면에 나서지 않아야 한다는 조직의 매커니즘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4명의 발기인과 동등한 자격으로 서명했을 따름이었다.

조소앙이 기초한 선언문은 해외 각지에 현존하는 단체는 크건 작건, 숨어 있건 나와 있건, 가리지 말고 유일한 최고 기관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자는 말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선언문은 한국 최초로 국민 주권론을 표방했다. 이른바 전제군주의 주권을 부정한 것이었다. 선언문은 조국 독립의 예비 단계로 통일 기관을 만들자고 호소했다. 이를 위해서 기존의 단체나 개인은 모두 모여서 회의를 하자고 제의했다.

그것은 이 선언을 기반 삼아 임시정부를 만들자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선언문에는 이 제의에 대한 찬동 여부를 묻는 질문서를 첨부했다. 그런 다음 신규식은 이 선언문을 해외와 국내를 망라하여 연락이 가능한 모든 지역에 발송하였다.

이로써 정부 수립이라는 독립운동 노선이 이론의 틀을 갖췄고 국민주권의 공화제로 국가 이념이 정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또한 대동단결론은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되 차후에는 개별적 투쟁을 유보하고 민족 역량을 결집한 통합적 독립 운동을 전개하자는 방향을 제시했으며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에 사회주의 노선을 수용하여 국제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한다는 의도를 반영했다.

마침 1917년 8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만국사회당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왔다. 신규식은 조소앙과 상의했다. 조소앙은 우선 조선사회당이라는 명칭을 써서 전문을 보내자고 했다. 이제 그들은 국제정세를 정확히 보고 있었다. 그들은 숙의 끝에 전문을 완성해 보냈다.

“지난 세계대전은 발칸 문제로 발생했습니다. 만일 한국이 일본의 노예 상태로 방치된다면 이로 인해 또 다른 전쟁이 필경 발발할 것입니다. 모든 민족은 정치적으로 균등해야 합니다. 이것이 국제 정의의 기본입니다. 작금에 대동단결선언을 마친 우리 한국인들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회의 의제에 포함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단소는 말하고 있었다

며칠째 달이 좋은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김태수의 단소는 오늘 따라 밤이 깊어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백주원은 그의 단소가 울 때마다 가슴이 저렸다.

평소에는 그렇게 활달한 남자가 어떻게 저런 처절한 소리를 내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아침에는 그렇게도 담백했던 남자가 밤이 오면 어떻게 저리 침울한 소리를 내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낮에는 그렇게도 가벼웠던 남자가 밤만 되면 왜 저렇게 깊어지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단소는 절망과 허무의 심연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단소는 사나운 비바람에 쓰러지는 풀잎 같은 소리를 내기도 했다. 단소는 성에가 흐르는 유리창처럼 차가운 것을 노래하기도 했다. 단소는 투명한 물에 비치는 고적한 어느 그림자를 머금고 있었다. 단소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며 울고 있었다. 단소는 혁명도 네가 없으면 무슨 의미냐고 말하고 있었다.

단소에는 깃발을 외면한 채 고즈넉이 앉아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단소는 동요하는 꽃 이파리 같았고 젖어 썩는 낙엽 같기도 했다. 단소는, 너의 생성과 소멸, 너의 존재와 부재까지도 다 내 가슴에 담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단소는 말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온 우주가 한갓 한 사람만으로 좁혀지는 기적이라고. 요컨대 단소는, 너는 이런 것을 아느냐고 무덤덤하게 묻고 있을 따름이었다.

백주원은 속옷에 바바리 코트를 급히 걸쳤다. 그녀는 단소를 찾아서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단소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단소 옆에 발을 멈췄다. 단소도 멈췄다. 김태수는 씨익 웃으며 백주원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백주원은 가슴 아프고 설렜던 자신이 오히려 민망해졌다. 그녀는 또옥똑 힘을 주어 말했다.

“경성에서 아버님을 만나 뵈었어요. 그리고 부인도요.”

김태수는 아주 경박한 어조로 대답했다.

“필호에게 들어 죄다 알고 있어요.”

“집에 가실 계획은 없는가요?”

그제서야 김태수의 어조가 진지해졌다.

“내가 백 동지 일을 간섭 않듯이 백 동지도 내 일을 묻지 마세요.”

백주원은 조금 억울하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단소 소리를 생각했다. 그녀는 그렇게 많은 것을 간섭하고 묻는 너의 단소는 뭐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김태수 앞으로 쭈그리고 앉았다.

“김태수 씨!”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한 선조들의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한 선조들의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박은식 #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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