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사건을 살짝 건드리고 침대 밑으로 숨다

[중국영화로 중국문화 읽기⑦] 러우예 감독의 <여름궁전>

등록 2008.06.19 11:12수정 2008.06.1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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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영화의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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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위홍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방황과 시대적 혼돈이 어우러지며 그녀는 자유와 욕망의 탈출구, 사랑에 빠져든다. ⓒ 유레카 픽쳐스


"그것은 뜨거운 여름밤에 불어닥친 바람 같았고 난 그로 인해 중심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는 그것을 뭐라고 정의할 수 없으니 사랑이라고 할 수밖에!"

이렇게 영화 <여름궁전(원제는 이화원, 頤和園)>은 여주인공 위홍의 일기 내레이션을 따라 2시간 넘게 길게 흘러간다. 위홍은 북한 접경인 투먼(圖們)에 사는데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홀아버지가 조선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는 김일성 사진이 걸려 있고 남자친구와 베이징에 있는 베이칭(北淸, 실존하지 않는 대학이지만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을 합친 이름 같다) 대학교 합격을 축하하는 춤을 추는데 그때 흘러나오는 노래는 하동진의 트롯 가요 <인연>이다.

고향을 떠나기 전 위홍은 남자친구와 담배를 피우고 또 노천에서 성을 경험한다. 1988년 대학생이 된 위홍에게 아버지 없이 친구들과만 생활하는 베이징은 그녀의 넘치는 열정과 자유, 불안과 방황을 더욱 주체할 수 없는 지경으로 이끄는 공간이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를 럭비공과도 같은 청춘의 격정적인 욕망을 간직한 위홍은 대학 생활의 주변부를 맴돌며 겉돈다. 그런 무의미한 생활에 지쳐갈 무렵 운명과도 같이 치명적인 사랑, 저우웨이를 만나게 되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중국정부와의 심한 불화로 오히려 유명해진 화제작

중국의 6세대감독 러우예(娄烨)의 <여름궁전>은 2006년 아시아영화로는 유일하게 칸영화제 경쟁부분에 초청되었다. 중국 정부의 검열을 받지 않은 상태로 출품했고 내용이 민감한 6·4 톈안먼사건을 다뤘다. 또 10번의 정사신 등 지나친 성묘사로 선정성이 문제가 되어 중국내 상영금지는 물론 감독인 러우예는 향후 5년간 중국 내 영화제작 금지처분을 받았다.


1989년 자유와 민주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탱크와 장갑차로 무력진압하며 발생한 유혈사태인 6·4 톈안먼사건은 중국의 모든 예술인들에게 하나의 부채이자 커다란 강박관념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러우예 감독도 <여름궁전>의 시대적 배경으로 톈안먼사건을 설정해 놓고 있는데 톈안먼 희생자들에게 그다지 많은 빚을 갚고 있지는 못해 보인다.

1988년 당시 중국은 결혼증명서가 없는 남녀의 숙박시설 혼숙을 불허했기 때문에 영화 속 정사신의 대부분은 교내 기숙사에서 이뤄진다. 6~8명이 공동생활을 하는 기숙사 빈 방에 틈입한 위홍과 저우웨이는 불을 끄고 어두운 침대에서 소리를 죽여 가며 성적 쾌락을 탐닉한다. 이 장면은 집단노동과 집단생활이 많은 사회주의의 어두운 시대상황에서 언론의 자유와 소통이 막힌 채 소리 죽이며 작은 행복을 찾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상실의 시대, 방향을 잃은 욕망과 쾌락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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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에서 사랑을 나누는 위홍과 저우웨이 운명과도 같은 사랑에 감염된 그들은 시대적 혼란 속에서 육체적 사랑에 빠져든다. ⓒ 유레카 픽쳐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실용주의는 경제 발전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와 함께 성숙된 민주의식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끌어안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회 곳곳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중국식 마키아벨리즘'으로 경도되어 도덕적 해이와 부정부패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불러오기도 한다.

자아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늘 불안하며 성적 탈출구에 집착하는 주인공 위홍의 모습은 혼란스런 시대상의 반영인 동시에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모호한 정체성의 중국사회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위홍과 저우웨이는 무절제한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기도 하고 황제의 여름궁전이던 이화원의 곤명호에서 함께 배를 타고 밤새 얘기를 나누며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지만 위홍은 오히려 저우웨이에게 헤어지자고 제안한다.

"저우웨이, 우리 헤어지자!"
"왜?"
"내가 이미 널 버릴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야!"

하지만 치명적 사랑에 감염된 위홍은 저우웨이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그가 다른 여학생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 둘의 사이는 조금씩 멀어지게 되는데, 이번엔 저우웨이가 위홍에게 이별을 제안한다.

저우웨이와 헤어진 위홍은 욕정에 얽히고설킨,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냉담하고 무관심해진 자신을 발견하면서도 저우웨이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버리지는 못한다. 물이 없는 수영장에 앉아 일기를 쓰는 위홍, 하루는 숨이 막혀 물 빠진 수영장바닥에 벌레처럼 웅크리고 뒹군다. 이 장면은 자아 분열과 정신적인 혼란과 성적 욕망 사이를 배회하는 그녀의 내면을 형상화한 것으로 읽힌다. 두 청춘의 불같던 사랑이 식어갈 즈음 6·4 톈안먼사건이 일어난다.

6·4 톈안먼 사건을 살짝 건드리고 침대 밑으로 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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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 마오쩌둥의 사진 앞을 지나는 위홍과 저우웨이 무력진압의 광풍이 있기 전 평화롭게 톈안먼 앞을 지나는 두사람 그러나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그들의 사랑도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한다. ⓒ 유레카 픽쳐스


영화 <여름궁전>은 89년 6·4 톈안먼사건과 같은 해 11월의 베를린장벽 붕괴, 91년 소련연방의 해체, 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97년 홍콩반환 등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공적서사와 위홍의 정신적 방황과 사랑의 행적을 추적해가는 사적구조로 이뤄져 있다. 두 서사구조를 같은 궤도상에 올려놓고 격동치는 시대에 따라 위홍의 자아분열과 성적욕망도 침대에서 함께 요동치도록 기획된 것 같다.

그러나 두 서사구조의 결합은 그다지 유기적이지 못하며 밀도감이 떨어진다. 중국정부의 사전검열과 강화된 사상통제 하에서 간접적이고 상징적인 기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감독의 처지를 감안하더라도 '이왕 건드릴 거면 좀 더 확실히 건드리지'하는 아쉬움이 크다.

위홍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리티와 또 여전히 사랑하는 저우웨이와 함께 톈안먼시위에 참가하지만 그것은 일탈과 분위기에 휩쓸리는 정도로 그려지고, 그런 어수선한 혼란과 상실의 시대에 그들의 삶이 더욱 표류할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는 배경 장치에 불과해 보인다.

저우웨이가 위홍의 가장 친한 친구 리티와 성관계를 맺고 위홍은 친구와 사랑을 모두 잃은 슬픔에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 투먼으로 돌아가며 리티와 저우웨이는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굵직굵직한 역사적인 사건이 시대를 뒤흔드는 동안 위홍은 저우웨이에 대한 사랑을 접지 못하고 저우웨이도 자신을 사랑하는 리티 곁에 머물지 못한다. 결국 저우웨이는 위홍을 생각하며 중국으로 귀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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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만의 재회 젊은 날의 열정과 사랑이 증발해버린 그들의 재회는 상실의 시대를 살았던 청춘의 창백한 초상화를 보여주는 듯하다. ⓒ 유레카 픽쳐스


젊은 날의 치명적인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위홍은 성적 쾌락의 순간에도, 고통의 순간에도 저우웨이를 떠올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다시 만난 두 사람에게 젊은 날의 열정과 사랑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여름궁전>은 결국 상실의 시대에 모든 열정과 젊음을 빼앗기고 물 없는 수영장을 뒹굴 듯 탈수된 채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중국 젊은이들의 초상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드높은 시대의 파도를 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으로, 그 시대의 혼돈과 방황의 탈출구였던 욕망의 기억들을 가슴에 간직한 채 이제는 담담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창백함과 공허함은 보는 이들에게 아련한 슬픔을 갖게 한다.

저우웨이를 사랑하고도 그를 붙잡지 못하는 리티는 저우웨이의 귀국 직전에 베를린에서 자살하는데 그녀의 묘비에 적힌 글이 소개되면 영화는 막을 내린다.

"자유와 사랑을 알았든 몰랐든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죽음이 네게 끝이 아니길. 빛을 사랑한 너였으니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길!"
#여름궁전 #이화원 #이허위엔 #톈안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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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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