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만에 남편 만나러 갑니다, 암매장지로

[현장] 충남 공주 왕촌 집단희생자 세 번째 위령제

등록 2008.07.13 11:04수정 2008.07.1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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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58년만에 처음으로 남편이 묻힌 무덤을 찾아나선 임행리(86)씨. 하지만 그를 맞은 것은 암매장지였다.

58년만에 처음으로 남편이 묻힌 무덤을 찾아나선 임행리(86)씨. 하지만 그를 맞은 것은 암매장지였다. ⓒ 심규상


"남편이 처형된 후 오늘 처음 찾아 왔어."

12일 충남 공주 왕촌리 작은살구쟁이 민간인집단암매장지 희생자 추모제에서 만난 임행리(86·전남 순천시 서면)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임씨는 1950년 당시를 생각하는 듯 한참을 침묵했다. 남편 장윤옥씨는 여순사건에 연루돼1948년 어느 날 경찰에 끌려갔다. 결혼한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임씨는 "순천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찰이 와서 끌고 갔다"며 "아직도 농사 짓는 일밖에 모르던 남편이 왜 끌려 갔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임씨는 남편이 법정에서 3년 형을 선고 받은 것으로 기억했다. 임씨는 아들과 두 딸과 함께 충남 공주형무소에 수감된 남편이 출소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전쟁이 터진 직후 여름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남편과 공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막 출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손님이 전해준 것은 남편의 사망통지였다.

"남편이 군인들에게 끌려가기 직전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다고 하더라구. 지금 끌려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오기 어려우니 출소하거든 내 고향에 찾아가 군인들에게 끌려간 사실을 전해주라고…. 남편이 미리부터 죽으러 가는 길인 줄 알았나봐…."


a  유가족들이 젯상에서 앉아 희생된 가족들에게 제주를 따르고 있다.

유가족들이 젯상에서 앉아 희생된 가족들에게 제주를 따르고 있다. ⓒ 심규상


임씨는 지난 해 남편이 묻혀 있는 장소를 전해듣고 이날 처음으로 위령제에 참석했다.

"말도 마. 이날까지 남편이 끌려가 죽었다는 말을 못하고 살았어. 참 험악했지."


"참 험악했지... 끌려가 죽었다는 말도 못하고..."

58년만의 만남이었지만 임씨를 맞은 건 남편의 유해가 아니었다. 언제 수습될지도 모를 암매장지였다. 

이날 오후 2시 열린 왕촌 민간인집단 희생자 위령제에는 모두 100여명이 참여했다.

곽정근 공주유족회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과거사법이 시행되고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며 "그러나 정작 집단처형의 경위와 배경에 대한 직권조사는 아직도 요원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진실화해위원회는 좀더 빠른 시일 내에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주검을 수습해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종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상임대표는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한 부모형제들의 넋이 구천을 헤매고 있다"며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과거를 잊자'고 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는 "영령들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진상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관철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a  희생자의 넋을 달래는 살풀이춤

희생자의 넋을 달래는 살풀이춤 ⓒ 심규상


a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심규상


공주 왕촌 현장에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 9일부터 11일 사이에 공주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비롯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민간인 등 1000여명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된 뒤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공주에서만 최대 2000명 희생... 추모위령공원 만들자"

현장에는 암매장지로 보이는 길이 30m, 폭 2.5m 가량의 구덩이 4개가 남아 있으며 일부 구덩이에서는 유골과 처형 당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탄피 등이 발굴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주에서 희생자된 사람들은 이들 만이 아니다. 

공주지역 민간인집단희생 피해자 현황 조사를 하고 있는 지수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공주 옥룡동 대추골, 장기면 다피리 고개, 대전형무소 등에서 자행된 인민군과 군경에 의해 최대 200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군경에 의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행사는 어디에서도 하고 있지 않다"며 "왕촌 살구쟁이에 추모위령공원을 조성해 공주 우금티사적지와 함께 평화와 인권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세 번째 위령제로 공주민주단체협의회와 공주지역 한국전쟁희생자추모사업회 등이 마련했다.

a  공주대 지수걸 교수가 암매장지에서 유가족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공주대 지수걸 교수가 암매장지에서 유가족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심규상


#공주 왕촌 #살구쟁이 #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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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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