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한자말 털기 (41) 부정

[우리 말에 마음쓰기 380] ‘나타내기-드러내기-말하기’와 ‘표현’

등록 2008.07.22 11:03수정 2008.07.2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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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부정

.. 국민 간의 화해를 위해서는 독일이 폴란드에 행한 중대한 부정不正을 인식하고, 폴란드 국민의 생활을 확실하게 할 충분한 공간을 보장하는 것 ..  <곤도 다카히로/박경희 옮김-역사교과서의 대화>(역사비평사,2006) 71쪽


“국민(國民) 간(間)의 화해(和解)를 위(爲)해서는”은 “국민 사이에 화해를 하자면”이나 “두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풀자면”으로 다듬습니다. “폴란드에 행(行)한”은 “폴란드에 저지른”으로 손보고, “폴란드 국민의 생활(生活)을 확실(確實)하게 할”은 “폴란드사람들이 마음놓고 지낼”로 손보며, “충분(充分)한 공간(空間)을 보장(保障)하는”은 “넉넉한 자리를 지켜주는”으로 손봅니다.

 ┌ 부정 : ‘불령(不逞)’의 잘못
 ├ 부정(不正) : 올바르지 아니하거나 옳지 못함
 │   - 부정 축재 / 입시 부정 / 부정을 저지르다 / 부정을 방지하다
 ├ 부정(不定) : 일정하지 아니함
 │   - 주거 부정
 ├ 부정(不貞) : 부부가 서로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함. 흔히 아내가 정절을
 │   지키지 않는 일을 이른다
 │   - 외간 남자와 부정을 저지르다
 ├ 부정(不庭) [역사]
 │  (1) 지방 관아의 신하가 임금을 뵈러 오지 아니함
 │  (2) 속국이 종주국에게 예물을 바치지 아니함
 ├ 부정(不淨)
 │  (1) 깨끗하지 못함. 또는 더러운 것
 │  (2) 사람이 죽는 따위의 불길한 일
 │   - 부정이 나다 / 부정이 들다
 ├ 부정(不精) : 조촐하거나 깨끗하지 못하고 거칠고 지저분함
 ├ 부정(不整) : 고르지 아니한 상태
 ├ 부정(否定) : 그렇지 아니하다고 단정하거나 옳지 아니하다고 반대함
 │   -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만 지었다
 ├ 부정(負定) : [역사] 백성들에게 공역이나 공물을 부담하던 일
 ├ 부정(釜鼎) = 부정기(釜鼎器)
 ├ 부정(副正) [역사]
 │  (1) 고려 시대에, 내알사ㆍ사복시ㆍ사의서ㆍ서운관ㆍ전농시에 둔 종사품 벼슬
 │  (2) 조선 시대에, 종친부ㆍ돈령부ㆍ봉상시ㆍ사복시ㆍ군기시와 그 밖의 여러
 │      관아에 둔 종삼품 벼슬
 ├ 부정(腐井) : 물이 썩은 우물
 ├ 부정(簿正) : 장부에 적힌 수효대로 갖춤
 │
 ├ 중대한 부정不正을 인식하고
 │→ 크나큰 잘못을 깨닫고
 │→ 엄청난 잘못을 느끼고
 │→ 어마어마한 잘못을 받아들이고
 └ …

국어사전에는 모두 열네 가지 ‘부정’이 실립니다. 몇 가지 말을 빼고는 ‘不-’를 앞가지로 쓰는 말입니다. ‘不-’를 앞가지로 붙인 낱말은 “-하지 않다/-가 아니다”를 넣어서 풀어낼 수 있습니다. 올바르지 않다(不正), 한결같지 않다(不定), 깨끗하지 않다(不淨), 고르지 않다(不整), 그렇지 않다(否定)로 쓰면 넉넉합니다.

역사 낱말도 제법 실려 있는데, 이 낱말들은 역사사전으로 옮겨 싣고, 국어사전에서는 덜어내야 옳다고 느낍니다.

“주거 부정” 같은 말은 “사는곳 모름”쯤으로 적어 봅니다. “부정 축재”는 “검은돈(구린돈) 모음”쯤으로 다듬을 수 있을까요. “입시 부정”은 다듬기 까다롭네요. “입시 잘못”이나 “그릇된 입시”로 풀어 볼까 하지만,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그대로 써야 할까요.


 ┌ 외간 남자와 부정을 저지르다
 │
 │→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
 │→ 다른 사내와 놀아나다
 └ …

보기글을 보면 “중대한 부정不正을 인식하고”처럼 쓰입니다. ‘부정’이라고만 적어 놓으면 다른 한자말과 헷갈릴까 봐 이렇게 썼을 테지요. 그러면, 이 보기글처럼 뒤에 한자를 붙였기에 좀더 잘 알아볼 수 있을까요? 헷갈리지 않고 잘 읽어낼 수 있는가요? 한자를 아는 사람만 알아듣는 말은 아닌가요? 한자를 모르는 이는 어떻게 하지요? 글쓴이(옮긴이)부터 헷갈릴까 걱정이 되는 말이기에 한자를 붙였을 텐데, 누가 읽거나 들어도 헷갈리지 않을 말로, 입으로 말할 때 곧바로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낱말로 다듬어 줄 수 없었는가요?


 ┌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만 지었다
 │
 │→ 그 여자는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말 없이 웃음만 지었다
 │→ 그 여자는 옳다거나 틀리다는 말 없이 웃기만 했다
 └ …

머리에 지식이 많이 들어 있을수록 말을 자꾸만 어렵게 쓰는 우리들이 아니랴 싶습니다. 머리에 지식이 많이 들어 있을수록 이런 지식을 살리거나 가꾸면서 더 많은 이웃과 더 즐겁게 좋은 생각을 나누지는 못하는 우리들이구나 싶습니다.

품고 있는 지식을 살찌워 아름답게 펼쳐내지 못하는 우리들로만 머무는구나 싶어요. 다 함께 즐거울 지식으로는 거듭나지 못하며, 이웃사람을 밟고 올라서서 우쭐거리는 지식으로만 나뒹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ㄴ. 표현

.. 그러나 ‘완충지대’란 낭만적인 단어는 적절치 못한 표현이다 ..  <함광복-DMZ는 국경이 아니다>(문학동네,1995) 31쪽

보기글을 가만히 보면, 토씨만 빼고는 죄다 한자말이라 하겠습니다. 글은 틀림없는 한글입니다. 그렇지만 말은 우리 말이 아닌 한자말입니다. 대학물 먹고 기자 노릇 하는 분들 말투가 으레 이러합니다. ‘완충지대-낭만적-단어-적절’ 같은 낱말을 어떻게 걸러내면 좋을지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스스로 헤아려 보시면 어떨까 싶군요. 아무 말썽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대로 쓰시든가.

 ┌ 표현(表現)
 │  (1)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언어나 몸짓 따위의 형상으로 드러내어 나타냄
 │   - 예술적 표현 / 표현 방법이 서투르다 /
 │     그 학생은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자그마한 선물을 드렸다
 │  (2) 눈앞에 나타나 보이는 사물의 이러저러한 모양과 상태
 │
 ├ 적절치 못한 표현이다
 │→ 알맞지 못한 말이다
 │→ 알맞지 못하다
 │→ 잘못된 말이다
 │→ 어울리지 않는다
 └ …

국어사전에 나온 보기글을 헤아려 봅니다. “예술적 표현”이 보입니다. 이와 같은 틀로 “문학적 표현”이라든지 “환상적 표현”이라든지 “정치적 표현”이라든지 “외교적 표현”이라는 말투가 쓰입니다. 한자말 ‘表現’ 하나로 그치지 않고 ‘-的’붙이 말투를 끌어들입니다.

다음 보기글로 “감사의 표현”이 보입니다. 이와 비슷한 틀로 “애정의 표현”이나 “믿음의 표현”이나 “이별의 표현”이나 “충성의 표현” 같은 말투가 쓰입니다. 토씨 ‘-의’도 불러들이는 한자말 ‘表現’입니다.

“표현 방법이 서투르다”라는 보기글이 보입니다. “나타내는 방법이 서투르다”는 이야기일 테지요. 그림을 그리는 이가 “표현 방법이 서투르다”면, “붓질이 서투르다”거나 “그림결이 서투르다”는 소리일 테지요.

 ┌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
 │→ 선생님을 고마워하는 뜻으로
 │→ 선생님한테 고맙다면서
 │→ 선생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 …

오늘날 사람들은 너나 없이 고등학교까지는 거의 모두 마치고, 웬만하면 대학 교육까지 받습니다. 그런데 글 한 줄 제대로 못 씁니다. 편지 한 장 야무지게 쓰는 사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말도 서툴고 글도 엉성합니다. 아무래도 생각을 단단히 여미지 못하니 말이 제대로 나오겠습니까. 얼이 곧추 서 있지 못한테 글 하나 알뜰하게 쓰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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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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