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이 놀던 곳에 오르다

설악산 유선대 등반

등록 2008.09.02 11:58수정 2008.09.0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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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적벽과 장군봉 오른쪽이 적벽, 왼쪽이 장군봉이다. 가운데는 무명봉.

적벽과 장군봉 오른쪽이 적벽, 왼쪽이 장군봉이다. 가운데는 무명봉. ⓒ 이현상


그러니까 10년도 더 된 모양이다. 친구 녀석이랑 설악산 등산을 위해 길을 나섰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다. 둘은 잠시 비를 그으며 비선대 산장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유선대 '그리움 둘'

유선대는 적벽과 무명봉, 장군봉을 잇는 바위능선이 마등령 들머리에서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다. 유선대에 '그리움 둘' 루트가 개척되기 이전부터 등반 흔적은 있었으나 확보물이 불량하고 등반루트에 관한 정보가 없는 상태였다.

2004년 산바라기 산악회가 해외원정 등반에서 목숨을 잃은 같은 산악회 고 박기정, 최영선 두 악우를 추모하기 위해 개척하였으며, 그래서 등반 루트의 이름도 '그리움 둘'이라 지었다. 애틋한 사연이 깃든 곳이다.
천불동 계곡의 입구이기도 한 비선대는 설악산의 대표적인 암벽등반 봉우리인 적벽과 장군봉의 발아래 있다.


비선대 산장에서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다소 위압적으로 적벽과 장군봉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올려다보는 적벽과 장군봉은 그 이름처럼 위엄하다.

몇 순배 잔이 돌고 술기운에 시야가 슬쩍 흐려지려는 바로 그때 내 눈에는 적벽에 개미처럼, 혹은 다람쥐처럼 사람이 붙어있는 게 보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마도 인공등반(인공적인 장비를 이용하여 암벽을 오르는 등반기술)을 하는 클라이머였을 게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 녀석에게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난 언젠가 저 벽을 오를 것이라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05년. 콩인지 팥인지도 모르는 친구 녀석에게 암벽 등산학교에 들어가자고 '통보'해 놓고 등록까지 대신해 두었다. 10여년이 흐른 즈음에야 마침내 비 오던 날 비선대 산장에서의 다짐을 이루게 된다. 개미처럼, 혹은 다람쥐처럼 그 벽을 오르게 된 것이다.

a 유선대 '그리움 둘' 길 우뚝 솟은 유선대의 릿지로 이어진 '그리움 둘' 등반 루트

유선대 '그리움 둘' 길 우뚝 솟은 유선대의 릿지로 이어진 '그리움 둘' 등반 루트 ⓒ 한동철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나는 작은 약속 하나를 지켜야했다. 나를 따라 1년 뒤 그악스럽게도 등산학교를 마친 집사람에게 유선대를 꼭 같이 오르자고 약속한 일이다.

유선대(遊仙臺)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선녀들이 놀던 곳'처럼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초보자들도 숙련자와 동행하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유선대 릿지로 이어진 '그리움 둘' 길은 대략 표고차 200미터에 이르는 암벽을 11피치로 나누어 등반하게 된다.


새벽녘 밤길을 도와 비선대 산장에 이르자 산악회 회원 몇몇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반가운 얼굴들이다. 적벽과 장군봉은 호위병처럼 늠름하게 어둠 속에서 실루엣만을 보여주고 서있다. 늦은 밤까지 술잔이 돌아간다.

a 본격적인 암벽등반 구간 '그리움 둘' 등반길에 많은 클라이머들이 등반 중이다.

본격적인 암벽등반 구간 '그리움 둘' 등반길에 많은 클라이머들이 등반 중이다. ⓒ 이현상


아침이 밝았다. 예정대로 유선대를 오르기로 한다. 전날의 음주와 부족한 수면, 뜨거운 햇빛…….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등산학교를 마쳤다지만 거의 1년 이상 암벽등반을 하지 않은 탓에 초보자와 다름없는 집사람까지 함께하는 등반이니 쉬운 길이라고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a 기암절벽 유선대를 오르며 볼 수 있는 기암절벽.

기암절벽 유선대를 오르며 볼 수 있는 기암절벽. ⓒ 이현상


첫 피치 크랙을 올라서면 비로소 유선대의 빼어난 모습이 드러난다. 첫 피치를 마치고 본격적인 암벽등반 루트에 들어서면 일반적인 등산로에서는 볼 수 없는 신비스러운 설악산의 속살이 드러난다. 수천수만 년의 풍화를 견뎌내고서야 창조해낼 수 있는 기암절벽이다.

a 내려다보이는 장군봉 암벽등반이 처음인 회사동료 심기수 대리 뒤로 장군봉이 보인다.

내려다보이는 장군봉 암벽등반이 처음인 회사동료 심기수 대리 뒤로 장군봉이 보인다. ⓒ 이현상


계속 고도를 높여나가자 우측으로 우람한 어깨를 자랑하며 늠름하게 서있던 장군봉이 어느새 발아래 내려다보인다. 장군봉은 다양한 난이도의 등반 루트가 개척되어 있어 클라이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처음으로 암벽등반 경험을 하게 된 회사동료는 한편으로는 짜릿한 고도감에, 또 한편으로는 성취감에 희비가 오락가락한다. 날개를 달거나 암벽등반을 하지 않으면 감히 '신선이 놀던 곳'을 어찌 오르랴.

a 울산바위 유선대 오르는 길에 보이는 울산바위

울산바위 유선대 오르는 길에 보이는 울산바위 ⓒ 이현상


총 11피치로 이루어진 유선대 '그리움 둘' 등반이 거의 막바지에 이를 즈음 멀리 속초 앞바다와 울산바위가 보이기 시작한다. 울산바위는 멀리에서도 그 장엄함이 말로 다할 수 없다. 유선대 '그리움 둘' 등반길은 전체적으로 초급 수준이지만 약간의 완력과 균형이 필요한 5피치의 오버행(90도 이상) 크랙과 고도감이 짜릿한 6피치의 언더크랙(아래 방향으로 갈라진 바위틈) 구간은 초보자에게 다소 벅찰 수도 있다.

a 유선대 정상 등반을 마치고 장비를 정리하고 있다.

유선대 정상 등반을 마치고 장비를 정리하고 있다. ⓒ 이현상


등반을 마치고 정상에 서니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넘나드는 운무가 신비롭다. 유선대에 처음 오른 집사람과 아예 암벽등반이 처음인 회사 동료는 다소 감격스러워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가장 중요하고도 위험한 하강이 남았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곧 하강 준비를 한다.

a 유선대 정상 유선대 등반이라는 작은 약속 하나를 지켰다.

유선대 정상 유선대 등반이라는 작은 약속 하나를 지켰다. ⓒ 이현상


유선대는 모두 11피치의 등반을 마치고 약 25m 정도 하강하면 마등령 들머리로 내려설 수 있다. 치명적인  등반사고는 대부분 하강 과정에서 발생한다.

a 유선대 하강 25m를 하강하면 마등령 들머리로 내려선다.

유선대 하강 25m를 하강하면 마등령 들머리로 내려선다. ⓒ 이현상


하강에서의 사고는 바닥까지 추락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선대는 60m 자일을 반으로 나누어 단 한 번의 두 줄 하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초보자에게는 부담이 덜한 곳이다. 하강으로 내려서면 바로 공릉능선이 끝나는 마등령 들머리의 일반 등산로에 닿는다.
#설악산 #유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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