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일, 다 맏이 몫이지요... 장남 할 게 못돼요"

[왕언니의 중국살이8] 조선족사회의 장남 문화

등록 2008.11.06 11:10수정 2008.11.06 11:1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주방아주머니. 사회화된 맏며느리 역할에 주위의 비난과 학습된 효심에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이 시대 마지막 맏며느리상이 아닐지. ⓒ 고의숙


"아줌마 혹시 더 편하고 좋은 일자리 생겨서 가는 거예요? 그럼 사실대로 말해요. 어지간하면 우리가 맞춰줄 수도 있으니까."
"아이고 아니라요. 그동안 사모님이랑 사장님, 또 다른 식구들도 모두 편히 해주고 이만한 데가 어디 있어요. 저도 정말 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내가 맏며느린데…."


일 년 넘어 일하던 주방아주머니가 가고 난 뒤, 몇몇 아주머니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들고 나면서 내 애를 태우는 중에 거래처 직원이 친척 아주머니 한 분을 소개했다. 이 아주머니는 고향에서 오는 3~4일만 기다려 달라는 부탁까지 하고도 못 미더워 비행기를 타고 올 만큼 일자리가 급했는데, 갑자기 그만둔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대개 새로 온 사람은 일이 맞지 않는다 싶으면 한 달 이내에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그만둔다. 이 분은 이미 나와 한 달 이상 함께 일하고, 또 나 없는 보름동안 빈틈없이 일을 잘해 동생이 모처럼 맘에 쏙 드는 아주머니가 오셨다고 칭찬을 했던 터라, 그 속내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시간을 내 아주머니와 마주 앉았다.

한숨 섞으며 풀어내는 아주머니의 속사정은 이랬다. 시어머님이 가벼운 중풍으로 좀 편찮으시긴 했지만 거동이 자유롭고 특별한 간병은 필요가 없으셨다. 요즘은 조선족 사회에서도 장남만 부모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돌아가며 모시기도 해, 그동안 모시던 어머니를 작은 아들이 모시기로 했다.

어머님이 작은 아들네로 거처를 옮기자 이참에 도회지에 나가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을 했고, 마침 친정 여동생이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해서 서둘러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별 불편이 없으셨던 시어머님이 갑자기 쓰러지셨단다. 거동을 하실 수 없게 되어 누군가가 붙어서 수발을 들어드려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런데 모시고 있던 동서가 갑자기 한국을 가게 되었단다.

"아니, 자기가 모시겠다고 했다면서 왜 갑자기 한국을 가요?"
"그게 전에 신청해 놓은 것이 이번에 합격이 되었대요. 그러니 가지 마랄 수 있나요."


"그래도 그렇지. 다른 형제도 있으면서 객지에 있는 맏동서를 오라는 건 좀 그렇다. 그러지 말고 어차피 아줌마도 돈벌이 나왔는데 월급 좀 더 드릴 테니까 간병인 쓰면서 다른 가족이 모시면 안 돼요?"
"저도 그 생각 왜 안 했겠어요. 사실 저도 가기 싫어요. 돈도 돈이지만 가서 노인네 대소변 받아낼 일 생각하면 끔찍해요. 여기서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들 것도 사실이고, 해도 어쩌겠어요. 노인 수발 들 사람이 없다는데, 동서처럼 지차 같으면야 모른 척 할 수도 있겠지만 맏며느리가 돼 같고…. 그러다 돌아가시면 원망 듣는 것도 무섭고, 또 나도 후회가 될 거 같아요. 좋은 일엔 동기간이지만 궂은일은 결국 다 맏이 몫이지요. 안 그래요?"

깔끔한 성품에 부지런하고 게다가 음식 솜씨도 좋아서 정말 모처럼 좋은 주방아주머니를 만났다 좋아했는데,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붙잡을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아주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아주머니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2년 여 전의 봉녀씨 내외가 떠오른다.


조선족 전통사회가 요구하는 장남이란 지위는?

a

봉녀씨 부부. 장남은 할 게 못된다고 여러 번 되뇌면서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순박한 분이었는데 잘 계신지 궁금해진다. ⓒ 고의숙


봉녀씨 내외도 우리 공장에서 6개월 쯤 일하다 장남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 역시 편찮으신 부모님을 모시느라 다른 형제들처럼 도회지로 돈벌이를 떠나지 못해 가난을 면치 못했다. 9년씩이나 병석에 누워계시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딱 2~3년만 돈 벌고 돌아오겠다면서 동생 내외에게 부모님 제사를 맡기고 나왔다.

그런데 아버님의 대상을 앞에 두고 3년간 제사를 모셔주기로 굳게 약속했던 동생네가 한국엘 가게 되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제사라서 집안 어른들도 모두 모이기에 소홀히 치를 수 없어, 결국 봉녀씨 내외는 어렵게 얻은 일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떠나면서 쓸쓸해하시던 아저씨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장남은 할 게 못돼요. 궂은일은 다 장남이니까 네가 해라 그러고… 다들 개방이 돼서 도시로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가도 장남은 부모나 제사 모시는 일 때문에 고향을 못 벗어나니 그저 늘 가난하게 살지요. 물려받을 재산이 어디 있어요. 지차들은 나가서 돈 벌어 오니까 떵떵거리고 살아도요. 장남은… 할 게 못돼요."

이번에 고향으로 돌아간 주방아주머니나 봉녀씨 내외나, 조선족 전통사회가 요구하는 장남이란 지위에 대해 자긍심보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아직도 형제 많은 장남들은 결혼할 때 불리한 조건이 되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사회가 씌워준 굴레가 너무 안쓰럽다는 생각이다.

얼마 전 조선족 직원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신랑 친척들과 우연히 합석을 하게 된 자리였다. 신랑의 형님이 취한 상태로 곁에 있던 남편에게 술을 권하자 그분의 이모께서 못마땅한 얼굴로 한마디 하셨다.

"집안의 맏이가 돼가지고 부모를 모시기를 하나, 동생이 혼인한다고 제대로 형 노릇을 하기를 하나 허구한 날 술에 절어가지고선, 에고 망신스러워서 원."

혀를 차며 나무라는 말씀에 그분은 술 권하던 손을 내려놓고는 자리를 뜨고 말았다. 40줄에 들도록 술로 세월을 보내고 직장생활도 제대로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있던 터지만, 그 순간 장남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안 대소사에서 마주친 어른들로부터 장남 노릇 제대로 못한다는 나무람을 들을 때마다 술로 달래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급속한 사회 변화에 맞추어 조선족사회의 장남에 대한 인식도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변화하고 있는 추세이긴 하다. 봉녀씨 내외는 9년간이나 병석에 누워계신 부모를 형제가 번갈아 모실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장남 몫이었던데 반해, 이번 아주머니는 그래도 삼형제가 돌아가며 모시기로 했었다고 하니 장남에게만 지워지던 부양책임이 조금은 서로 나누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궂은일 앞에선 결국 장남 몫이 되고 만다.

아직 40~50대의 중년들에게 장남이란 지위는 어쩔 수 없는 굴레가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 자녀수가 한둘인 가정이 대부분이라 어쩌면 장남이나 차남의 구분 자체가 불필요하고, 이런 문제조차 한 세대만 지나면 옛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중년들의 장남 지위는 더욱 그 현실이 안타깝다. 자신의 노후 준비가 소홀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의 노후를 책임질 장남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도래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장남은 막중한 책임과 함께 그에 버금가는 특권이 주어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권위는 사라진 채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의무만 남아 장남으로서 살아가기 힘들어하는 모습이다. 부모공양의 책임을 홀로 지고 경제적 상황이 열악한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장남과 맏며느리의 처지는 마냥 안쓰럽기만 하다.

거침없는 자본주의 물결은 농촌사회에도 새로운 모습이 요구되는데 노인부양 문제는 여전히 전통적 가족 형태에 의지하고 있다. 점점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집안의 궂은일을 은연 중 장남에게만 미룰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보장제가 속히 자리 잡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조선족 #장남 #노인문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중국에 살면서 오블에 <고단한 삶의 놀이터>란 방을 마련하고 타국살이의 고단함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블로그 운영한 지가 일 년 반이 되었으나 글쓰기에 대해 늘 자신이 없어 좀 더 체계적이고 책임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에 시민기자 활동을 신청합니다. 주로 사는 이야기와 여행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주부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게 뭔 일이래유"... 온 동네 주민들 깜짝 놀란 이유
  2. 2 3일마다 20장씩... 욕실에서 수건을 없애니 벌어진 일
  3. 3 팔봉산 안전데크에 텐트 친 관광객... "제발 이러지 말자"
  4. 4 참사 취재하던 기자가 '아리셀 유가족'이 됐습니다
  5. 5 공영주차장 캠핑 금지... 캠핑족, "단순 차박금지는 지나쳐" 반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