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무어 글, 데이비드 로이드 그림의 <브이 포 벤데타>는 당대 마거릿 대처 정부가 보였던 파시즘적 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2005년 제임스 맥테이그 감독에 의하여 영화화되었다.
시공사
때는 어느 미래의 영국. 핵전쟁 이후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 상태가 되었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폭력과 혼돈의 공간에서, 마침내 정권을 잡은 이들은 파시스트와 우익 세력 정당 '노스파이어'였다. 그들의 슬로건은 이러했다.
"국력은 청빈으로, 청빈은 신앙으로."
강력한 정부를 이룬 그들은 집과 거리마다 감시, 도청 장치를 설치했고 경찰권력과 언론을 장악했으며 사회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흑인, 파키스탄인, 동성애자, 급진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무자비한 박해를 받으며 찍 소리 못하고 박스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게 되었다. 공룡 교회와 장사꾼 성자들이 적극 달라붙어 도왔다. 인간의 영감과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어느 누구도 정부에 반대하지 못하며 무조건적인 박수갈채를 보내야 하는 독재 국가. 파시즘의 악령이 찾아온 것이다. 바로 <브이 포 벤데타>의 세계다.
흔히 만화라면 철모르는 아이를 병들게 하는 것이라 치부하기 일쑤인 한국에서, 만화책의 이야기를 짓는 앨런 무어는 초라한 괴짜로 보일 만하다. 그러나 앨런 무어는 그래픽노블 씬에서 이른바 '전설'로 일컬어지는 작가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왓치맨>은 타임지가 선정한 1923년 이후 최고의 100대 소설에 꼽혔고, 실상 읽어 보자면 어른도 어려워 골치가 아프다. 그런 앨런 무어가 <브이 포 벤데타>를 마거릿 대처의 극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지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픽션다운 과장이 있지만 만화 속 파시즘의 세계는 대처리즘과 많이 닮아 있다. 사실 파시즘의 악령은 요즘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일상 안과 밖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특히 한국은 더하다. 숨 막힐 정도로 빠른 산업화를 거치며 서구 땅덩어리를 따라잡으려 했으나, 시민사회 영역이 튼실해질 여유도 없이 개인이 빠진 집단주의가 세를 불렸다. 전체주의가 나타나기 쉬운 땅이다. 과연 괴상한 향수에 빠져 옛 독재자의 기념관을 세우자는 이야기가 싱거운 농담이 아닌 진지한 논의가 되는 걸 보면 두려운 마음이 아니 들 수 없다.
사실 미치광이 혁명가 '브이(V)'의 이야기는 한국에 만화책보다 영화로 먼저 선보였다. 제임스 맥테이그 감독의 영화는 무척 재미나고 통쾌하여 거듭 돌려 보았다. 이비 역할의 나탈리 포트만은 왜 그리 예쁘단 말이냐. 그런데 외려 원작이 되는 만화책은 다르다. 영화보다 훨씬 복잡하고 음울하다. 이비도 못 생겼으니 절로 나탈리 포트만이 그리워진다. 그럼에도 내가 영화가 아니라 만화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까닭은, 쉬이 희망을 말하지 않으며 쉬이 절망을 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브이 포 벤데타>는 혁명의 이야기다. 그런데 거기서 영화는 안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혁명은 간단하고 유쾌하다. 그러나 혁명이란 정말이지 그렇지 않다. 세상을 뒤바꾸는 일이 마냥 즐거울 리 없다. 혁명에는 혼란과 폭력이 함께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