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가는 촛불에 질서 정착 보람 느꼈는데..."

고 김남훈 경사 영결식, 동료 경찰관 '편지' 눈길

등록 2009.01.22 18:49수정 2009.01.22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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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재개발지역 철거민들을 강제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고 김남훈 경사 영결식이 열린 22일 오전 서울 송파구 경찰병원 영결식장에 한 기동대원이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놓여 있다. ⓒ 권우성

22일 오전 서울경찰병원에서 열린 고 김남훈(31) 경사의 영결식 영전에 동료 경찰관이 출동 대기 중 쓴 것으로 보이는 편지가 올라 눈길을 끌었다.

'삼가 김남훈 경사님의 영전에 바칩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라는 제목이 붙은 이 편지에는 생명의 위협 속에 시위 진압에 나서는 기동대원들의 심정이 담겨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고 김 경사의 동료는 "엊그제까지만 해도 시위진압 버스 안에서는 대원들 간에 웃음꽃이 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는데, 이틀이 지난 지금 모두들 아무 말없이 버스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고 편지를 시작했다.

이어 "작년 여름 촛불시위를 맨몸으로 막아낸 기동부대 대원으로서, 조금씩 촛불이 꺼져가는 것을 보며, 사회질서가 정착되어 가는 보람을 느꼈다"면서 "하지만 그렇게 쉽게 질서가 오질 않겠지요?"라고 한탄했다.

또 "수많은 경찰관의 생명을 희생하면서도 멀리만 보이는 건전한 시위문화가 원망스럽기만 하다"며 "고인은 누구를 위해 희생했나, 저희들은 누구를 위해 몸을 던져야 하나, 답답하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이 동료는 "언제쯤 우리나라에도 선진 법문화가 정착될까"라며 "지금 용산대로를 막고 시위대 700명이 시위를 하고 있다는 무전이 왔는데 불상사 없이 끝나도록 해 달라, 명복을 빈다"고 끝을 맺었다.

[편지 전문] "여기는 광화문 네거리..."
삼가 김남훈 경사님의 영정에 바칩니다.


여기는 광화문 네거리... ...

엊그제까지만 하여도 시위진압 버스 안에서는 대원들 간에 웃음꽃이 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난 지금 모두들 아무 말 없이 버스 창밖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 촛불시위를 맨몸으로 막아낸 기동부대 대원으로서, 조금씩 촛불이 꺼져가는 것을 보며, 사회질서가 정착되어 가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질서가 오질 않겠지요?

수많은 경찰관의 생명을 희생하면서도 멀리만 보이는 건전한 시위문화가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고인은 누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까? 저희들은 누구를 위해 몸을 던져야 합니까? 답답합니다.

고인이 누운 자리에 우리들 중 누군가가 누워 있을 수도 있겠지요? 또 동의대학교 사태처럼, 서해교전처럼, 나라를 위해 죽음을 당한 사람은 침묵해야 하는 것입니까?

매일 크고 작은 시위 현장에서 내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머릿속으로만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이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경찰이 되도록 하늘나라에서 도와주십시오.

지금 저희들은 시위진압 과정을 둘러싼 뉴스밖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말들은 참 잘합니다. 생명의 위협이 오락가락하는 시위현장을 겪어보지도 않은 사람들끼리 하는 말들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듭니다.

언제쯤 우리나라에도 선진 법문화가 정착될까요? 진정 소중한 가치를 지켜주십시오. 지금 용산대로를 막고 시위대 700여명이 시위를 하고 있다는 무전이 왔습니다. 출동해야만 합니다.

더 이상 불상사 없이 끝나도록 해 주십시오. 저희들 모두의 기도로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용산 철거민 참사 #고 김남훈 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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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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