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세대 삼촌과 함께 봉하 마을에 가다

삼촌의 갑작스런 제안, 새벽 열차 타고 떠나

등록 2009.05.28 11:13수정 2009.05.28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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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 곳곳에 걸려있던 조기. 국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 곽진성

봉하마을 곳곳에 걸려있던 조기. 국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 곽진성
 
대학교 마지막 학년을 보내고 있는 내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장 만나 뵙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당시 처음 투표권이 생긴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표를 선사해 내 손으로 직접 뽑은 대통령이었고 또 재임 이후에도 한결같이 지지를 보냈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언론 지망생인 내게 있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인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미래가 보장된 판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그리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야당 국회의원이 된 그의 삶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는 그를 꼭 만나고 싶었다.

 

꿈같은 그 순간이 온다면 그가 한결 같이 걸어온 신념에 대해 전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젊은이에게 있어 가장 존경스러웠던 대통령은, 그 부족한 젊은이가 꿈을 제대로 꺼내보기 전에 안타까운 서거를 하셨다. 그래서일까, 그의 죽음이 아직도 사실로 믿기지 않는다. 참, 힘이 빠지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젊음이란 게 참으로 이기적인 모양이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서거 앞에서도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봉하마을에 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와 지극히 소소한 개인적인 일에 신경 쓸 만큼 나의 젊음에는 이기심이 있었다. 속으로, 현실적으로 갈 수가 없으니 그냥 집인 대전에서 추모를 하며 마음을 추스리자 정도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당시 내게 있어 현실적이라는 말은 도피의 의미가 담겼었던 것 같다. 그런데 25일 늦은 밤이었다. 삼촌에게서 연락이 왔다. 원래 이 시간에는 약국 마감을 하느라 바쁜 시간일텐데 갑작스러운 연락이었다. 반갑고 조금은 궁금한 마음에 이유를 물으니 삼촌은 새벽에 부산으로 가는 열차 시간을 알아봐 달라고 하신다.

 

"삼촌 왜 갑자기 부산을? 설마?"

"그래. 대통령 마지막 모습 뵈러 가야지, 마음이 불편해서 가만 있을 수가 없네"

 

수원에 사는 삼촌은 다음날 새벽 일찍, 봉하 마을에 추모를 하러 간다고 했다. 그 말에 내 마음이 울컥했다. 나보다 훨씬 바쁜 가족도, 사람들도 저마다 틈을 내서 봉하마을 찾고 있는데 와중에, 나는 내 이기심만으로 산다는 반성이 들었다. 그래서 삼촌에게 외쳤다.

 

"삼촌, 저도 같이 갈게요. 내일 새벽에 봬요"

 

일주일 내내 일을 하고 딱 하루를 쉬는 삼촌, 보통 쉬는 날 하루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데 이번에 삼촌은 할머니께 '봉하마을에 다녀와서 이번주는 못갈 것 같습니다'란 말을 했다. 할머니의 대답은 '내가 못가서 아쉽다. 내 몫까지 다녀 오라'였다.

 

가자 봉하 마을로, 민주의 성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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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 마을 가는 길, 김해 진영에 도착하니 봉하마을로 가는 무료 셔틀버스가 운영되고 있었다 ⓒ 곽진성

봉하 마을 가는 길, 김해 진영에 도착하니 봉하마을로 가는 무료 셔틀버스가 운영되고 있었다 ⓒ 곽진성
 

그래서였다. 26일 새벽, 열차를 타고 삼촌과 부산으로 향했다. 봉하 마을로 향하는 기분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안타까움, 그리고 슬픔. 문득 뜨거운 역사의 소용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앉은 삼촌은 현재의 상황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우리나라에서 자기 신념을 바친 대통령이 있었던가? 그동안 다 소인배들이었지, 정말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 있는 정치인들을 이겼네. 하지만 앞으로 노무현 대통령처럼 자신의 신념을 거는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까? 앞이 캄캄하네"

 

삼촌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삼촌은 소위 말하는 386세대다. 친구 분들 중에는 학생 운동을 하다가 강제 징집을 당해서 힘든 생활을 보낸 사람도 있었다. 그렇기에 독재를, 절망을 직접 맞부딪쳐 본 세대였다. 언젠가 삼촌 친구분들과 술 자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전해들었던 생생한 80년대의 이야기는 내가 들은 어떤 이야기들보다도 마음에 와닿았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난 그런 삼촌 앞에서 깜냥도 안되면서 정치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떠들었던 적이 있다. 정치 관련 기사도 썼고, 언론사 정치부에서 대학생 인턴 기자도 했다는 괜한 자존심에 역사 의식도 없이 여러 말들을 많이 했었던 것이다. 그때 그 엇나간 생각을 바로 잡아준 것이 삼촌의 일침이었다. 삼촌의 당연한 물음 앞에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권을 편드는 거지?"

"친일과 쿠데타 세력이 어떻게 이 나라에 판을 친 수가 있니?"

 

한때는 그런 삼촌에게 궁금한 점이 있었다. 삼촌은 남들 살만큼은 사는데 왜 그렇게 진보적인 성향을 좋아하는지 말이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들려온 대답.

 

"다 같이 잘 살아야지 재밌지, 어떻게 혼자만 잘 사려고 해"

 

맞다. 그랬다. 사람사는 세상, 어떻게 혼자만 잘 살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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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에 붙어 있는 민주의 성지에 개들은 오지마라- 펼침막, 마음이 떨린다 ⓒ 곽진성

봉하마을에 붙어 있는 민주의 성지에 개들은 오지마라- 펼침막, 마음이 떨린다 ⓒ 곽진성

 

소소한 과거를 회상하다보니 어느덧 부산에 도착해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김해 진영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거기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들 대부분은 조문을 위해 봉하 마을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할아버지부터, 벌써 눈시울이 붉어진 아주머니들, 그리고 슬픔에 잠긴 내 또래의 젊은이, 맑디 맑은 어린이들이까지,

 

제각각으로 살아왔지만 목적이 같은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존경했던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 먼길을 마다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가고 있었다. 봉하마을, 민주의 성지로 말이다.

 

김해 진영에 도착하니 봉하 마을까지 가는 무료 셔틀 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봉하 마을 근처까지 쉽게 올 수 있었다. 혹여나 조문이 늦어질까 바삐 걷던 삼촌과 나, 그런데 눈 앞에 보인 하나의 펼침막을 보고 걸음이 멈춰졌다.

 

'민주의 성지에 개들은 오지 마라'

 

한 개인이 적은 문구였는데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정말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본 이들은 무슨 낯이 있어 고인을 뵈러 온다는 것일까? 아마도 많은 국민들이 이들을 막아서고, 또 때론 다툼도 있었던 것은 피어 오르는 분노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장에서 보니 전직 대통령을 극단으로 몰고 간 이들을 막아선 것은 보수 언론이 말하는 '노사모'도 어떤 '정치적 무리'가 아니었다. 이들을 막은 것은 국민이었다. 계산적이지 않고 순수하다 못해 순박하다는 소리를 듣는 국민들이 울분을 못이겨 '정치인들은 무슨 낯으로 오냐'고 했고 ' 00일보 오기만 해봐'라고 고성도 지르고 있었다. 사랑하는 대통령을 잃은 국민의 절규는 아프게 세상을 찌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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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 분향소 ⓒ 곽진성

봉하마을 분향소 ⓒ 곽진성

 

삼촌과 함께 대통령 영정 앞에 국화를 놓고 추모를 했다. 삼촌은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큰 절을 했다. 조문을 하며 더러는 울었고, 또 더러는 울음보다 깊은 침묵으로 슬픔의 역사를 메워갔다. 마음을 추스리기는 쉽지 않았다. 조문을 마치고 나오며 대통령이 운명을 달리한 부엉이 바위를 멀리서나마 지켜보았다. 떨리는 마음을 가눌 길은 없었다. 그곳에서 그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대통령의 아픔을 보듬는 조문 행렬은 끝이 없었다. 오는 길이 어디고 가는 길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길은 끝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민심이란 길인 모양이었다. 생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토록 갈망했던 국민의 지지 말이다.

 

"생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곳을 향해 걷는 건 처음 봤다"는 삼촌의 말이 귓가를 스친다. 그렇게 울고, 슬퍼하며 사람들은 대통령의 마지막을 추모하고 있었다. 뒤늦은 후회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제야 안 모양이다. 무엇이 옳음이고, 무엇이 그름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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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에 전시되어 있던 여러 알림판 ⓒ 곽진성

봉하마을에 전시되어 있던 여러 알림판 ⓒ 곽진성

 

망설이는 당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돌아오는 길, 또 걸음이 멈춰지는 문구가 있었다. '이 시대 기자들의 영혼은 사주에 팔려 바쳤다'는 것이었다. 국민을 섬기던 대통령의 슬픈 서거 앞에서, 누가, 어느 언론인이 이 문구가 잘못되었다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까?

 

문득 가슴이 먹먹해 졌다. 내가 꿈꾸고 해내고 싶은 그 꿈이 '사회악'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삼촌은 오는 길에 농조로 '넌 저런 기자는 되지 마라'라고 하신다. 나는 쓰게 한번 웃었다. 아직 기자 준비하는 지망생 주제에, 자신있게 예라고 말할 입장이 못된다. 하지만 속으로 꼭 그리하겠다는 짧은 다짐을 한다. 이 다짐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저울 한 눈금 만큼이라도 옳음이 있는 세상이 될까?

 

조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여정에 심신이 지친 하루였고 시간도 근 하루를 다 소비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힘이 들어도 옳다고 믿은 역사의 현장에 방관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원동력이 될 것 같다. 살아 있는 것은 옳은 것을 향해 행동할 수 있는 기회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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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을 향해 걸어가며 눈에 띈 국화, 마음이 아파온다 ⓒ 곽진성

봉하마을을 향해 걸어가며 눈에 띈 국화, 마음이 아파온다 ⓒ 곽진성

 

문득, 눈을 떠보니 다시 현실이다. 현실은 어둡고 암울하다. 있어서는 안될 일들이 너무나 고스란히 일어나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발을 내딛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게 된다.

 

그때 문득 친구 K에게서 연락이 왔다. 독감에 걸린 그는 29일 아픈 몸을 이끌고 경복궁으로 나간다고 한다. 또 다른 친구도, 아는 사람도 대통령의 마지막을 뵈러 간다고 했다. 문득 궁금했다. 세상을 바꾸는 힘, 그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방관하지 않는 자세일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서 도피하지 않는 것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현실로 부터 도피하지 말야야겠다는, 그것이 우리가 존경하는 대통령에 대한 마지막 예일 테니 말이다.

 

29일,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 그날의 하루를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국민'을 위한 대통령의 뜨거운 영결식이 될 것이라는 자그만한 기대를 간절히 가져본다. 부디 슬픔 속에서, 희망을 찾는 날이 되기를 바라는 바람이다. 어두운 나날이지만, 한줄기 희망은 함께 할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분명 우리가 공유한 하루는 우리의 역사를 옳음으로 만드는 초석이 될 것이라 믿게 된다.

 

힘이 빠지는 세상이지만 용기를 내어보자. 한명, 한명의 희망이 모여 이 불의의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요, 틀리지 않는 길이었다고. 부디 암울한 현실에 망설이는 당신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29일 11시, 경복궁으로, 시청으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2009.05.28 11:13 ⓒ 2009 OhmyNews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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