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더럽히는 우리 삶 (72) 싱글맘/싱글대디

[우리 말에 마음쓰기 653] '홀어미'가 싫으면 '홀엄마'도 있고 '한엄마'도 있고

등록 2009.05.29 08:36수정 2009.05.2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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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싱글맘 가족, 싱글대디 가족

.. 나무 벤치 세 개가 나란히 축축하다. 왼편에서는 싱글 대디 가족이 와서 앉는다. 오른편에선 싱글 맘 가족이 와서 앉는다 ..  《김종휘-아내와 걸었다》(샨티,2007) 37쪽


'나무 벤치(bench)'는 '나무 걸상'으로 다듬습니다. '가족(家族)'은 '식구'로 손질해 줍니다.

 ┌ 싱글맘(single mom) : '싱글마마(single mama)'를 줄여 이르는 말
 └ 싱글대디 / 싱글팜

요즘 세상은 온통 미국말로 이루어집니다. 일도 놀이도 공부도 학문도 언론매체 기사마저도 미국말투성이입니다. 아주머니 아저씨가 즐겨보는 연속극에도 미국말은 심심치 않게 튀어나오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마주한다는 정책이나 시설에도 미국말은 곳곳에 스며듭니다. 그러니 '나무 걸상'이라는 말을 못 쓰고 '나무 벤치'라고 쓰는 우리들이 됩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야 '싱글맘'이나 '싱글대디'가 낯설 뿐 아니라 낯부끄러운 낱말이라 느끼지만, 우리 세상 구석구석 이 낱말이 두루 퍼져 있습니다. 이 낱말을 쓰는 분들은 더없이 당차고 떳떳하며, 영어로 가리키는 당신들 이름이 번듯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싱글맘이나 싱글대디가 모인다는 인터넷모임은 수두룩하게 많습니다. '싱글'이 아닌 사람들은 아이 이름을 따서 '아무개 맘'이나 '아무개 팜'이라는 또이름을 쓰곤 합니다. 인터넷으로 만나는 '동네 아줌마'들은 '서울맘'이니 '인천맘'이니 '부산맘'이니 하면서, 당신들 스스로 '엄마'이기보다는 '맘(mom)'이기를 바라고, 으레 이렇게 말해야 하거니 생각합니다.


제가 가끔 들여다보는 인터넷모임에 '맘스홀릭 베이비'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맘스클럽 예비엄마교실'이라는 강좌가 있습니다. '맘스클럽'이라면서 '예비엄마'를 말하니 살짝살짝 우습습니다만, 그나마 '예비맘'이라 안 적으니 반갑기는 해도, '맘스클럽'이라고 할 바에는 그냥 '예비맘'이라 할 때가 더 어울리지 않느냐 싶습니다.

 ┌ 싱글 대디 가족이 와서 앉는다
 │→ 아버지와 아들네가 와서 앉는다
 │→ 아버지와 딸네가 와서 앉는다
 │→ 아빠만 있는 식구들이 와서 앉는다
 ├ 싱글 맘 가족이 와서 앉는다
 │→ 어머니와 딸네가 와서 앉는다
 │→ 어머니와 아들네가 와서 앉는다
 │→ 엄마만 있는 식구들이 와서 앉는다
 └ …


우리 말에 '홀어미'와 '홀아비'가 있습니다. 저마다 옆지기가 먼저 죽어 없는 홑짝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싱글맘'이나 '싱글팜' 또는 '싱글대디'란, 제 짝꿍이 죽어서 없는 사람만 가리키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홀어머-홀아비'를 달가이 여기지 않기도 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말 '홀어미'와 '홀아비'는 왜 "옆지기가 죽어서 없는 홑짝"만 가리켜야 할까 궁금합니다. "옆지기가 죽어서 없는 홑짝"뿐 아니라 "옆지기와 헤어져 홀로 지내는 남은 짝"을 가리키는 자리에는 쓸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세상이 달라지면 낱말뜻도 달라지기 마련이고, 세상흐름에 걸맞게 숱한 낱말뜻이 새로 담기곤 합니다.

 ┌ 홀어미 / 홀아비 - 홀어버이
 ├ 홑어미 / 홑아비 - 홑어버이
 ├ 한어미 / 한아비 - 한어버이
 ├ 외어미 / 외아비 - 외어버이
 └ …

한쪽 어버이만 있다고 해서 '한부모'라는 새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어버이'라는 말도 쓸 법합니다. 그리고 '한어미'와 '한아비' 같은 말도 쓸 만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한다면, 우리 삶자락을 알맞게 담아낼 싱그럽고 수수한 낱말은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우리 모습을 치레하고프기만 하다면, 겉차림에만 매달리거나 얽매인다면, 속치레와 속가꿈에는 눈을 두지 못한다면, 이제나 앞으로나 온통 영어나라가 될밖에 없습니다. 영어나라가 되는 일이 나쁜 삶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가꾸지 못하고 남한테 기대기만 하는 흐름에 젖어들면서 우리 넋과 얼은 흐리멍덩해지고 우리 마음과 생각은 쪼그라들고 마니 안쓰러울 뿐입니다.

ㄴ. 에너제틱한 싱글맘

.. 내가 아는 서른 살의 에너제틱한 싱글맘이 있다. 그녀는 이혼을 결심한 후였지만 가족들의 격려에 힘입어 아이를 낳았고 남부럽지 않게 호사스럽게 키우고 있다 ..  《김윤수-17+i, 사진의 발견》(바람구두,2007) 192쪽

'에너제틱(energetic)한'이란 무엇일까 한참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이 다 있나 싶어 놀랍니다. 국어사전에는 틀림없이 안 나오는 낱말로, 누가 보아도 영어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어를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꼭 지난날 지식인들이 '여느 사람들은 안 쓸 뿐더러 여느 사람들 삶하고 동떨어진 한자말이나 한문을 아무렇게나 쓰던 매무새'하고 닮은 말씀씀이입니다.

'에너제틱'을 읊는 분으로서는 이 낱말만큼 당신 느낌이나 생각을 잘 담아내는 낱말이 없다고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대뜸 이렇게 읊지 않을 테지요. 인터넷으로 '에너제틱'을 찾아봅니다. 뜻밖에도 온갖 곳에 이 낱말을 쓰고 있으며, 문학한다는 사람이건 신문사 기자이건 대학교수이건, 또 '커리어우먼'이라고 하는 사람이건, 하나같이 이 낱말을 입에 달고 있습니다. 혀를 내두르다가 문득, 이런 말씀씀이는 혀를 내두를 노릇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씀씀이하고 멀리 떨어진 채 살아가는 저 같은 사람이야말로 오늘날 세상흐름과 동떨어졌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아주 많이 뒤처진 바보가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그녀(被女)'는 '그 엄마'나 '그 동생'이나 '그 후배'로 다듬고, "이혼(離婚)을 결심(決心)한 후(後)였지만"은 "이혼을 생각한 뒤였지만"이나 "헤어지기로 다짐한 뒤였지만"이나 "따로 살려고 마음먹은 뒤였지만"으로 다듬습니다. "가족(家族)들의 격려(激勵)에 힘입어"는 "식구들이 북돋아 주어서"나 "식구들이 힘껏 도와준 데 힘입어"로 손보고, '호사(豪奢)스럽게'는 '돈 펑펑 써 가며'나 '무엇이든 다 해 주면서'로 손봅니다.

 ┌ 서른 살의 에너제틱한 싱글맘
 │
 │→ 서른 살 먹은 힘이 넘치는 혼자 사는 애엄마
 │→ 서른 살 먹은 다부진 홀엄마
 │→ 서른 살 먹은 싱그러운 홑엄마
 │→ 서른 살 먹은 꿋꿋한 한엄마
 └ …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니 '홀어미'라 하면 되지만, 이 낱말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다면, '홀엄마'라 해 보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북돋우거나 살찌우면서 새 뜻과 새 느낌을 담아내기 힘들다 한다면, '홀엄마-홀아빠'처럼 새 낱말을 빚어내면 새 뜻과 새 느낌을 담을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홀-'이 달갑잖다면 '홑-'을 씁니다. '홑-'도 영 내키지 않는다면 '한-'을 씁니다. '한-'마저 마뜩하지 않다면?

글쎄, 이 말도 싫고 저 말도 싫어 그냥 영어로 말하려 한다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도 싫고 저 말도 싫다면, 우리 스스로 한결 어울리고 좀더 걸맞으며 더없이 들어맞는 낱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져 주는 말이 아니니까요. 누가 덥석 안겨 주는 선물 같은 말이 아니니까요. 말을 해야 하는 사람 스스로 빚어내야 하고,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 몸소 일구어야 합니다.

문학하는 사람이 만드는 말이 아닙니다. 국어학자가 만드는 글이 아닙니다. 이 땅에 발붙이는 우리들 누구나 만드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이웃하고 어깨동무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이라면 누구라도 만드는 글입니다.

스스로 일구니 문화이며 삶입니다. 내 힘으로 가꾸니 문화이자 삶입니다. 내가 소매 걷어붙이며 갈고닦으니 문화인 가운데 삶입니다.

우리 말과 글이 우리 마음자리를 알뜰히 가꾸고 우리 생각줄기를 튼튼히 북돋우도록 하자면, 바깥말에 휘둘리거나 바깥말에 속곳을 내주는 어줍잖은 몸가짐과 마음가짐은 고이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넋을 믿고 내 얼을 사랑하면서 내 말을 껴안고 내 글을 쓰다듬을 줄 알아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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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외국어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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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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